KOMSTA가 STAR가 된 이야기-2 진정한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생명이 없는 무생물조차도 모두 미래를 향해서 나아간다. 오직 머물러 있는 것은 유물(遺物)이고 역사이며 추억일 뿐이다. 의료봉사는 야전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전위 전술이다. 그래서 결과보다는 과정을 음미하고 즐길 줄 알아야한다. 미시적으로 부딪히는 봉사에서 우연의 연속이 거시적인 필연을 만들어나간다. 그래서 모든 삶은 우연과 필연을 건너다니는 파동과 같다.
이미 100회 행사를 몽골에서 거국적으로 성대하게 치른 마당이라 101회 KOMSTA 의료봉사는 허탈하고 왜소했다. 잔치가 끝난 후에 오는 흥진비래 증후군이었다. 101차는 인원모집부터서 썩 부드럽지 않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라도 의미를 찾아야 했다. 벌써 18년이라! 그 때의 첫 사랑이 이루어졌다면 태어난 아이가 헌헌장부가 되었으리라. 101차는 처음처럼 진지하되 조용하게 치루는 것이 자연스러울 거 같았다. 그러나 101은 전후가 대칭인 야누스(Janus)적인 숫자로 과거와 미래를 돌아보는 상징을 살리고 싶었다. 옛 사람들은 100이에서 1 이 빠지는 것을 여백(餘白)이라고 했다. 그 99인 白에 一을 더한 것이 百이다. 百이 완성 도착이라면 다시 새 출발하는 것은 101이다. 이 말은 억지가 아니다. 소위 말하는 還甲이라는 것도 六十甲子를 한 바퀴 돌고 난후 첫 해를 말하지 않던가?
10년도 지나고 100회도 지났으니 의료봉사를 무겁게 감싸고 있는 어설픈 책임감, 의무감, 사명감 같은 강박관념을 감히 벗어버리고 싶었다. 이제 이무기가 된 프로처럼 가볍고 편하게, 즐겁고 여유롭게, 다양하고 낭만적으로 재정립해 보고 싶다.
다시 낡은 비망록를 펼쳐본다. ‘인생은 알 수 없는 여정이다. 가야할 곳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랐다. 그래도 가야 할 젊음이 있다’고 쓰여 있다. 그 젊음의 여세를 몰아서 가야할 길을 찾아보았다.
지금은 이미 기라성 같은 스타가 된 히말라야 8천m 14좌 등정자들인 엄홍길과 박영석이 함께 운영했던 ‘국제캠프’에서 박영석에게 우리 최초 의료봉사를 대행시켰다. 카투만두에는 박영석의 게스트하우스‘빌라에베레스트’의 매니저 앙도르지가 있어서 네팔 현지 의식주, 행정, 일정, 예약 등 스케쥴을 관리해준다고 해서 걱정을 안했다.
당시 월간 사람과 산 편집장이던 박인식형 소개를 받아서 이화여대 신경정신과교수 이근후박사를 동대문 이대병원으로 가서 만났다. 이근후 박사 소개로 한국간질협회(장미회)를 세운 연세대의대대학원장을 역임한 김명호 명예교수를 만났다. 계획서와 팜프렛을 충무로 인쇄소에서 뽑아들고 버버리코트 깃을 세우고 여전도회관에 있는 장미회를 찾아갔다. 그들에게 정확한 브리핑을 하고 필요한 서류들을 수차 준비하여 제출한 다음 공식적인 초청장 문제를 해결했다. 이 초청장이 없으면 약품통관이 안된다고 한다.
1993년 2월 13일 살 에이는 서울을 떠나 네팔의 카투만두로 향했다. 아침 일찍 아시아나를 타고 홍콩에 가서 7시간을 기다려 Transit하는 기다림이 지루해서 홍콩관광에 나섰던 기억은 아련하다. 그 때 그 사람, 젊은 벗들이 문현기, 장준혁, 김용주한의사였다. 네팔의 들에는 유채꽃이 노랗게 피어있었다.
이제는 대한민국 국적항공기가 바로 카투만두로 직항한다. 3시간 15분 늦은 시차에 우리는 느긋하게 적응하기만 하면 된다. 이번 의료봉사는 엄홍길 휴먼재단과 함께 한다고 해서 첫 콤스타 1차 의료봉사는 박영석, 이번 101차 의료봉사는 엄홍길과 엮어지나보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엄홍길 휴먼 재단에서는 엄홍길의 세계최초 16좌 등정을 기념하는 16개 학교를 세울 계획이라고 한다. 에베레스트 가는 길에 있는 팡보체(4200m)에 첫 번째 학교를 세웠다. 카투만두에서 110km떨어진 타르프 지역에 KOICA와 제2의 학교를 짓는다고 해서 그리로 가게 될 것 같았다. 타르프 가는 길은 너무 험해서 괜찮은 랜드크루져나 랜드로바 같은 짚(Jeep)을 타고 가야하고 숙소는 텐트라고 해서 MTB(산악자전거)를 가지고 가기로 했다. 산악자전거를 타고 가서 의료봉사를 하고 저녁에는 텐트생활을 할 작정이었다.
지나가서 더욱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추억이 떠올랐다. 1993년 2월 15일 네팔 동부 돌카 지역에 있는 가우리상카르 병원에서 ‘한의사해외의료봉사단‘이 맨 처음 의료봉사를 했을 때도 넓은 논바닥에 텐트를 치고 등반대를 따라다니던 쿡과 키친보이들 시중을 받으면서 행복한 의료봉사를 했던 기억이 오버랩 되었다.
‘벌써 나의 마음은 카투만두에서 타르푸까지 거친 비포장길을 MTB를 타고 헐떡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저녁이면 아늑한 텐트에서 주정(酒精;Spirit)으로 불을 밝히리라. 밤이면 내리는 소나기가 지나가면 쏟아져 내리는 별빛과 은하수. 동트는 아침 잿빛 하늘 그리고 여명...’ 이렇게 소설을 쓰고 있었다. 늘 고달픈 현실 고달픈 내일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해몽보다는 꿈을 더 중시한다. 현실보다는 이상이라고 할까!
의료봉사야 늘 그렇지만 komsta 실무자들이 다 알아서 세팅한다. 지원한 사람들은 우아하고 품위있게 세팅된 의료봉사에 참석하기만 하면 된다. 그래도 엄홍길 휴먼재단과 상견례를 한다고 해서 얼굴마담으로 나갔다. 콤스타 홍희경양과 휴먼재단 이사로 있는 류동훈 한의사, 엄홍길 휴먼재단 사무국장 홍옥선 선배를 만나서 같이 일정을 논의하고 식사를 했다. 그러나 自初至終, 다 말할 수 없지만 저녁까지 얻어먹고 못 가게 되서 휴먼재단 측에 참 죄송하게 되었다. 류동훈, 홍옥선 두 분에게도 미안해서 전화도 아직 못했다. 언젠가 결자해지 해야지~~ㅎ흠! 사실 참가자들 중 너무 연로하신 어른들도 계시고 죄다 오지 경험이 없는 분들이라 타르프를 고집하면 안가겠다는 사람이 너무 많을 것 같고 경비도 만만찮았다. 실무자인 홍희경양이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다고 난색을 표하는 형편이라 속으로 환호작약했던 타르프를 포기하기로 했다. 사실 타르프 때문에 티베트, 카라코람하이웨이, 타클라마칸 사막을 같이 원정했던 서성준선수를 섭외했는데 그 쪽도 난감한 입장이 되어버렸다.
의료봉사 지역은 카투만두에서 1차의료봉사, 2차는 포카라에서 의료봉사를 하기로 했다. 포카라 의료봉사는 선교단체 겸 여행사에게 맡겼는데 이곳도 터무니없다고 한다. 처음 달콤한 목소리로 홍희경양을 유혹하던 감언이설(甘言利說)이 나중에 낭중지추(囊中之錐)처럼 변했다고 한다. 손해배상 위약금 이야기도 나왔다. 이번 101차는 콤스타 홍희경양의 데뷔전으로 여기저기서 좌충우돌하면서 크고 작은 폭음이 끓이질 않았고 가는 곳마다 화약 냄새가 자욱했다는 후문이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진다. 인디언 샤먼(Shaman)처럼 별을 보고 지혜를 구해야할 때! 그러나 막막한 어둠 속에 별 빛조차 없다. 이 때 나짐 히크멭Nazim Hikmet의 詩가 계시처럼 어둠속에서 들려왔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여행은 시작된다.” 우리의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KOMSTA가 STAR가 된 이야기-2 진정한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생명이 없는 무생물조차도 모두 미래를 향해서 나아간다. 오직 머물러 있는 것은 유물(遺物)이고 역사이며 추억일 뿐이다. 의료봉사는 야전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전위 전술이다. 그래서 결과보다는 과정을 음미하고 즐길 줄 알아야한다. 미시적으로 부딪히는 봉사에서 우연의 연속이 거시적인 필연을 만들어나간다. 그래서 모든 삶은 우연과 필연을 건너다니는 파동과 같다.
이미 100회 행사를 몽골에서 거국적으로 성대하게 치른 마당이라 101회 KOMSTA 의료봉사는 허탈하고 왜소했다. 잔치가 끝난 후에 오는 흥진비래 증후군이었다. 101차는 인원모집부터서 썩 부드럽지 않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라도 의미를 찾아야 했다. 벌써 18년이라! 그 때의 첫 사랑이 이루어졌다면 태어난 아이가 헌헌장부가 되었으리라. 101차는 처음처럼 진지하되 조용하게 치루는 것이 자연스러울 거 같았다. 그러나 101은 전후가 대칭인 야누스(Janus)적인 숫자로 과거와 미래를 돌아보는 상징을 살리고 싶었다. 옛 사람들은 100이에서 1 이 빠지는 것을 여백(餘白)이라고 했다. 그 99인 白에 一을 더한 것이 百이다. 百이 완성 도착이라면 다시 새 출발하는 것은 101이다. 이 말은 억지가 아니다. 소위 말하는 還甲이라는 것도 六十甲子를 한 바퀴 돌고 난후 첫 해를 말하지 않던가?
10년도 지나고 100회도 지났으니 의료봉사를 무겁게 감싸고 있는 어설픈 책임감, 의무감, 사명감 같은 강박관념을 감히 벗어버리고 싶었다. 이제 이무기가 된 프로처럼 가볍고 편하게, 즐겁고 여유롭게, 다양하고 낭만적으로 재정립해 보고 싶다.
다시 낡은 비망록를 펼쳐본다. ‘인생은 알 수 없는 여정이다. 가야할 곳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랐다. 그래도 가야 할 젊음이 있다’고 쓰여 있다. 그 젊음의 여세를 몰아서 가야할 길을 찾아보았다.
지금은 이미 기라성 같은 스타가 된 히말라야 8천m 14좌 등정자들인 엄홍길과 박영석이 함께 운영했던 ‘국제캠프’에서 박영석에게 우리 최초 의료봉사를 대행시켰다. 카투만두에는 박영석의 게스트하우스‘빌라에베레스트’의 매니저 앙도르지가 있어서 네팔 현지 의식주, 행정, 일정, 예약 등 스케쥴을 관리해준다고 해서 걱정을 안했다.
당시 월간 사람과 산 편집장이던 박인식형 소개를 받아서 이화여대 신경정신과교수 이근후박사를 동대문 이대병원으로 가서 만났다. 이근후 박사 소개로 한국간질협회(장미회)를 세운 연세대의대대학원장을 역임한 김명호 명예교수를 만났다. 계획서와 팜프렛을 충무로 인쇄소에서 뽑아들고 버버리코트 깃을 세우고 여전도회관에 있는 장미회를 찾아갔다. 그들에게 정확한 브리핑을 하고 필요한 서류들을 수차 준비하여 제출한 다음 공식적인 초청장 문제를 해결했다. 이 초청장이 없으면 약품통관이 안된다고 한다.
1993년 2월 13일 살 에이는 서울을 떠나 네팔의 카투만두로 향했다. 아침 일찍 아시아나를 타고 홍콩에 가서 7시간을 기다려 Transit하는 기다림이 지루해서 홍콩관광에 나섰던 기억은 아련하다. 그 때 그 사람, 젊은 벗들이 문현기, 장준혁, 김용주한의사였다. 네팔의 들에는 유채꽃이 노랗게 피어있었다.
이제는 대한민국 국적항공기가 바로 카투만두로 직항한다. 3시간 15분 늦은 시차에 우리는 느긋하게 적응하기만 하면 된다. 이번 의료봉사는 엄홍길 휴먼재단과 함께 한다고 해서 첫 콤스타 1차 의료봉사는 박영석, 이번 101차 의료봉사는 엄홍길과 엮어지나보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엄홍길 휴먼 재단에서는 엄홍길의 세계최초 16좌 등정을 기념하는 16개 학교를 세울 계획이라고 한다. 에베레스트 가는 길에 있는 팡보체(4200m)에 첫 번째 학교를 세웠다. 카투만두에서 110km떨어진 타르프 지역에 KOICA와 제2의 학교를 짓는다고 해서 그리로 가게 될 것 같았다. 타르프 가는 길은 너무 험해서 괜찮은 랜드크루져나 랜드로바 같은 짚(Jeep)을 타고 가야하고 숙소는 텐트라고 해서 MTB(산악자전거)를 가지고 가기로 했다. 산악자전거를 타고 가서 의료봉사를 하고 저녁에는 텐트생활을 할 작정이었다.
지나가서 더욱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추억이 떠올랐다. 1993년 2월 15일 네팔 동부 돌카 지역에 있는 가우리상카르 병원에서 ‘한의사해외의료봉사단‘이 맨 처음 의료봉사를 했을 때도 넓은 논바닥에 텐트를 치고 등반대를 따라다니던 쿡과 키친보이들 시중을 받으면서 행복한 의료봉사를 했던 기억이 오버랩 되었다.
‘벌써 나의 마음은 카투만두에서 타르푸까지 거친 비포장길을 MTB를 타고 헐떡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저녁이면 아늑한 텐트에서 주정(酒精;Spirit)으로 불을 밝히리라. 밤이면 내리는 소나기가 지나가면 쏟아져 내리는 별빛과 은하수. 동트는 아침 잿빛 하늘 그리고 여명...’ 이렇게 소설을 쓰고 있었다. 늘 고달픈 현실 고달픈 내일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해몽보다는 꿈을 더 중시한다. 현실보다는 이상이라고 할까!
의료봉사야 늘 그렇지만 komsta 실무자들이 다 알아서 세팅한다. 지원한 사람들은 우아하고 품위있게 세팅된 의료봉사에 참석하기만 하면 된다. 그래도 엄홍길 휴먼재단과 상견례를 한다고 해서 얼굴마담으로 나갔다. 콤스타 홍희경양과 휴먼재단 이사로 있는 류동훈 한의사, 엄홍길 휴먼재단 사무국장 홍옥선 선배를 만나서 같이 일정을 논의하고 식사를 했다. 그러나 自初至終, 다 말할 수 없지만 저녁까지 얻어먹고 못 가게 되서 휴먼재단 측에 참 죄송하게 되었다. 류동훈, 홍옥선 두 분에게도 미안해서 전화도 아직 못했다. 언젠가 결자해지 해야지~~ㅎ흠! 사실 참가자들 중 너무 연로하신 어른들도 계시고 죄다 오지 경험이 없는 분들이라 타르프를 고집하면 안가겠다는 사람이 너무 많을 것 같고 경비도 만만찮았다. 실무자인 홍희경양이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다고 난색을 표하는 형편이라 속으로 환호작약했던 타르프를 포기하기로 했다. 사실 타르프 때문에 티베트, 카라코람하이웨이, 타클라마칸 사막을 같이 원정했던 서성준선수를 섭외했는데 그 쪽도 난감한 입장이 되어버렸다.
의료봉사 지역은 카투만두에서 1차의료봉사, 2차는 포카라에서 의료봉사를 하기로 했다. 포카라 의료봉사는 선교단체 겸 여행사에게 맡겼는데 이곳도 터무니없다고 한다. 처음 달콤한 목소리로 홍희경양을 유혹하던 감언이설(甘言利說)이 나중에 낭중지추(囊中之錐)처럼 변했다고 한다. 손해배상 위약금 이야기도 나왔다. 이번 101차는 콤스타 홍희경양의 데뷔전으로 여기저기서 좌충우돌하면서 크고 작은 폭음이 끓이질 않았고 가는 곳마다 화약 냄새가 자욱했다는 후문이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진다. 인디언 샤먼(Shaman)처럼 별을 보고 지혜를 구해야할 때! 그러나 막막한 어둠 속에 별 빛조차 없다. 이 때 나짐 히크멭Nazim Hikmet의 詩가 계시처럼 어둠속에서 들려왔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여행은 시작된다.” 우리의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