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마스떼” 천혜의 자원 히말라야가 있는 곳. 세계의 지붕 네팔로 KOMSTA가 간다.
인천 국제공항을 출발, 긴 여정 끝에 카트만두 공항에 도착했다. 착륙하면서 보이는 계단식 논과 드문드문 보이는 집들. 집집마다 지붕이 달려 있는 태양열 전지가 반짝여 마치 내 첫 네팔 방문을 환영해 주는 듯 보였다. 세계 1위의 위용을 자랑하는 인천 공항에는 훨씬 못 미치는 공항이었지만, 갈색의 인테리어와 특유의 정감 있는 디자인이 이곳이 네팔임을 실감케 했다.
현지 교민 정승순씨께서 마중나와 주셔서 인사를 하고 숙소로 향했다. 그런데 왠지 숙소로 가는 길이 낯설게 느껴 지지 않았다. 따스한 햇살. 춥지도 덥지도 않은 살기 좋은 기후조건. 아~!! 케냐!! 작년에 의료봉사활동으로 다녀온 케냐의 모습이 순간 오버랩되어 나타났다. 비포장 도로. 뿌연 먼지. 영국의 지배가 남기고 간 자동차 우측통행. 자동차와 오토바이와 약간의 흙먼지가 섞인 광경까지. 두려움과 낯설음이 아니라 친숙한 첫인상으로 다가온 네팔. 이번 의료봉사도 따뜻하고 보람찰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숙소로 가는 길에서 느낀 것은 네팔 사람들은 정말 운전을 잘 한다는 것이었다. 정말 차 1대가 지나가게엔 주먹 1개 정도의 공간밖에 없는 작은 골목도 한번의 긁힘 없이 부드럽게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Thamal 거리를 둘러보았다. 부산의 국제시장이나 보수동 책방거리를 연상케 하는 느낌이랄까. 마침 축제기간이라 무료로 암벽등반 체험을 시켜주었는데, 의료봉사 일정상 히말라야 트래킹과 암벽등반을 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짧게나마 달랠 수 있었다.
진료 첫날, 아침 6시 반에 기상해 옷가지와 진료 물품들을 챙겨 봉사활동 장소로 향했다. 우리 나라와 같이 출근 시간대에 교통 정체가 그리 심하지는 않지만, 예상치 못한 일들로 일정이 늦어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서둘러 아침을 챙겨먹고 진료소로 향했다. 처음 도착했을 땐 아침 일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인파가 몰려와 약간 당황했었다. 그러나 그 인파를 보고 열심히 하자고 서로를 독려하는 선배님들을 보니 그 당황감은 열심히 해 보자는 파이팅으로 바뀌어 있었다.
네팔의 의료 환경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네팔의 의학대학은 총 4개이며, 각 학교의 정원은 한 학년당 15~2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네팔의 인구가 우리 나라의 인구와 비슷한데, 인구 수에 비해 의사 수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사실 교회 바로 앞에 종합병원이 있기는 했지만, 의사 이름만 20명 정도 붙어있을 뿐, 진료는 1~2명 밖에 하고 있지 않았다. 실제로 네팔에서의 의사 월급은 약 200불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여러 군데에 자신을 등록시켜 놓고 하루에 1~2시간씩 일하는 식으로 일하는 의사가 많다고 한다.
카트만두에서 기억에 남는 환자는 12살 남자아이였다. 2년 전에 지붕에서 떨어져 왼쪽 팔꿈치를 다친 후 치료를 받지 못해 ㄱ자 모양으로 굳어버린 상태였다.. 자침 전에는 딱딱히 굳어서 전혀 움직이지 않던 팔이 자침 후 “침은 아프지만 팔 움직임은 훨씬 부드러워졌다”고 했다. 골절 후 뼈가 붙을 때 olecranon의 크기가 커져버려 아귀가 맞지 않아 더 이상의 호전은 오지 않았다. 보호자 말로는 현지 의사에게 보여주니 그냥 뜨거운 물에만 계속 담그라고 했다는 것이다. 보호자에게 지금은 다른 치료방법이 마땅치 않으니 꾸준히 운동이라도 시켜 주라고 이야기를 하였지만... 못내 아쉬움이 남고 안타까운 환자였다.
카트만두에서의 이틀의 의료봉사를 뒤로 하고 무글링으로 이동했다. 카트만두 → 무글링 → 포카라 → 인도 국경까지 이어지는 국도. 우리나라 경부선에서 신의주까지 이어지는 1번 국도와 같은 도로였다. 우리나라 경부선은 왕복 8~12차선이지만 이곳은 중앙선도 제대로 없는 2차선이었다. 그리고 납치사건이 많이 발생해서 지나가는 차마다 꼭 경찰이 차 안을 검문하니 어느 정도의 교통체증은 당연지사. 그러나 한국과 달리 불평하는 사람도, 경적을 울리며 짜증내는 자동차가 단 1대도 없다는 것이 신기했다. 게다가 꼬불꼬불 언덕길에 트럭 4대가 고장이 나서 차가 기어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Stuck in the middle" 차 안에 3시간동안 갇혀 있으니 온 몸이 찌뿌둥해 죽을 지경이었다. 바람도 쐘 겸 밖으로 나왔는데.. 와우!! 한국에선 볼 수 없었던 별천지와 은하수들!! 우리나라 하늘에서 별을 볼 수 없는 이유는 환경오염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또다른 이유는 바로 전기!! 네팔은 한국처럼 전기 사정이 좋지 않아서 저녁 6~8시까지는 전기 공급이 중단된다. 일부에서 자가 발전기를 돌리기는 하지만 한국에 비하면 새발의 피. 한국에서 귀성길 정체나 휴가철 정체때엔 짜증만 내며 투덜투덜 했을 나인데, 네팔에 와서 그런지 네팔 정서에 적응하여 차가 아무리 막혀도 이 상황을 더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또다른 ‘내’가 되어 있었다.
7시간의 긴 여정을 거쳐 (평소엔 3시간이면 되는 거리) 무글링 숙소에 도착해서 늦은 저녁을 11시경에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무글링에서는 총 환자 예상이 200명 정도밖에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늘 오후는 비교적 여유롭게 지낼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했다. 그러나 예상은 역시 예상일 뿐. ‘어? 지금쯤이면 끝나야 하는데?’ 진료가 빨리 끝나면 오후에는 무글링의 명물인 케이블카를 타 볼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던 나는.... 왠지 모르게 서글펴졌다. 그러나 우리 진료소에 오기 위해 산에서 몇시간을 걸어내려 온 환자들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우리가 놀러온 건 아니지 않느냐. 시간이 남아서 구경을 간다면 좋겠지만, 기다리는 환자들을 두고 가는건 도리가 아니지. 열심히 계속 진료합시다.” 진료부장님의 격려와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와주신 환자분들을 위해서 우리는 더 열심히 진료에 임했다.
무글링은 산악지형이어서 그런지 피부병 환자 비율이 엄청 많았다. 무글링에서만 약 500명의 환자가 홨는데 그중 200명 정도가 피부질환으로 가려움증, 통증을 호소했다. 넉넉하게 준비해 갔다고 생각했었던 연고도 무글링에서 거의 대부분 사용했지만 턱없이 부족해서 너무 아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죄송스러웠다.
결국 진료는 무사히 마쳤으나 케이블카 마감시간인 5시를 훌쩍 넘기고..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물론 우리는 아쉽긴 했지만 오늘도 무사히 진료를 끝냈다는 뿌듯함을 가지고 귀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장소협조를 해 주신 무글링 유지분께서 케이블카 회사에 전화를 하셨다. 케이블 카 3대를 특별히 빼 놓았으니 얼른 가서 타고 오라는 말이 이어졌다. 덕분에 멋진 경치를 감상할 수 있었다. 비록 정상에서 내려 둘러볼 시간도 없었고, 내려올땐 전기가 끊겨 약 10분 정도 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상황이 무섭긴 했지만, 무글링 주민들이 베풀어 준 호의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무글링에서 일정을 마치고 포카라로 이동하는 길. 만약 아침에 이동하면 절벽 위를 지나면서 멋진 경치를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역시 진료일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밤에 이동을 했다.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고 했던가. 밤에 이동하는 버스에도 낭만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한국을 떠난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지만 문득 노스텔지아를 느껴서일까. 진선두 원장님의 노래를 시작으로 남행열차, 아파트, 어머나, 찰랑찰랑, 찬찬찬, 호랑나비, 동요와 만화 주제가... 그러나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건 통역도우미 케이비와 실바 부부의 네팔 전통노래 ‘레쌍삐리리’. 이 노래의 뜻은 ‘날 수 있다’는 어깨가 들썩이는 노래인데 그 노래를 들으면서 왠지 우리 버스도 밤하늘 위로 날아가 버릴듯한 느낌이 들었다.
포카라에서는 김선하 원장님의 환자분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중풍 후유증 환자분이셨는데, 오른쪽 전체가 마비감과 구금불개 상태이셨고 환자가 걷기는 커녕 장정 2명에게 업혀 오신 환자분이셨다. 무려 2시간을 한 환자분께 투자하시더니, 오른쪽에 감각이 일부 돌아오고 못 움직이시던 턱도 약간 벌릴 수 있었다. 원장님께 연신 고마워하시던 보호자 분들을 보니, 힘든 일정속에서도 한의사로서의 자부심과 뿌듯함이 나도 모르게 솟구쳐 올랐다.
포카라.. 저녁 늦게까지의 진료에도 불구하고 늘 나를 아침 5시 반에 기상하게 만드는 신기한 곳이었다. 숙소에서 나와 무작정 한 곳으로만 걸었다. 벼 베는 농부들, 커피를 마시며 쉬고 있는 사람들, 태권도복을 입고 조깅하는 아이들, 짐을 머리에 이고 걷는 아낙, 집 앞에서 속옷 바람으로 아침 차 한잔을 하고 있는 사람들.. 이 모두가 “안나 푸르나”와 마차푸차“와 어우러져 한편의 멋진 수채화가 되었다. 특히 끝없이 펼쳐진 황금빛 논밭고 그 사이로 끝없이 이어진 길. 그리고 그 위의 장엄한 안나 푸르나.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 되어 내 머리에 영원히 박혀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빨리빨리’에만 떠밀려 살던 나에게 네팔은 문화적 충격 그 자체였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네팔을 가난한 ‘후진국’ 정도로만 생각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세계 최고의 에베레스트산과 1년에 4번 벼농사를 지을 수 있는 멋진 자연환경이 있는 곳 네팔. ‘삶의 질’이 높은 것 또한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KOMSTA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많이 알고 있었지만 기회가 닿지 않아 많이 아쉬웠었다. 그런데 1993년 1차 네팔 의료봉사를 기념하는 101차 네팔의료봉사에 참가하게 되어 감회가 더욱 새로웠던 것 같다. 더구나 한의사가 되고 나서 첫 해외의료봉사였기에 더욱더 뜻깊은 추억이 될 것이다. KOMSTA 창단때부터 애써주신 김규만 단장님 임일규 고문님, 김선하 원장님, 진료부장 이 인 원장님 등 이번 101회 의료봉사를 위해 애써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특히 젊은 한의사도 소화하기 힘든 빡빡한 일정이었는데, 노익장을 과시해 주신 임일규 고문님과 김선하 원장님께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한번 더 드리고 싶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고흥 보건소 소속으로 KOMSTA를 통해 한의학을 알릴 수 있어 더욱 뜻깊은 봉사활동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고흥에서 나로호를 쏘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았는데, 나로 인해 아름다운 고장 고흥을 조금이나마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생겼던 것에 대해 정말 감사하고 있다. 아울러 공중보건의로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해외 여행 허가를 내 주시기가 쉽지 않으셨을텐데, 인류애와 자비심, 너그러운 仁의 마음으로 흔쾌히 허락을 해 주신 박병종 고흥군수님과 김승용 계장님, 류점순 여사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나마스떼” 천혜의 자원 히말라야가 있는 곳. 세계의 지붕 네팔로 KOMSTA가 간다.
인천 국제공항을 출발, 긴 여정 끝에 카트만두 공항에 도착했다. 착륙하면서 보이는 계단식 논과 드문드문 보이는 집들. 집집마다 지붕이 달려 있는 태양열 전지가 반짝여 마치 내 첫 네팔 방문을 환영해 주는 듯 보였다. 세계 1위의 위용을 자랑하는 인천 공항에는 훨씬 못 미치는 공항이었지만, 갈색의 인테리어와 특유의 정감 있는 디자인이 이곳이 네팔임을 실감케 했다.
현지 교민 정승순씨께서 마중나와 주셔서 인사를 하고 숙소로 향했다. 그런데 왠지 숙소로 가는 길이 낯설게 느껴 지지 않았다. 따스한 햇살. 춥지도 덥지도 않은 살기 좋은 기후조건. 아~!! 케냐!! 작년에 의료봉사활동으로 다녀온 케냐의 모습이 순간 오버랩되어 나타났다. 비포장 도로. 뿌연 먼지. 영국의 지배가 남기고 간 자동차 우측통행. 자동차와 오토바이와 약간의 흙먼지가 섞인 광경까지. 두려움과 낯설음이 아니라 친숙한 첫인상으로 다가온 네팔. 이번 의료봉사도 따뜻하고 보람찰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숙소로 가는 길에서 느낀 것은 네팔 사람들은 정말 운전을 잘 한다는 것이었다. 정말 차 1대가 지나가게엔 주먹 1개 정도의 공간밖에 없는 작은 골목도 한번의 긁힘 없이 부드럽게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Thamal 거리를 둘러보았다. 부산의 국제시장이나 보수동 책방거리를 연상케 하는 느낌이랄까. 마침 축제기간이라 무료로 암벽등반 체험을 시켜주었는데, 의료봉사 일정상 히말라야 트래킹과 암벽등반을 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짧게나마 달랠 수 있었다.
진료 첫날, 아침 6시 반에 기상해 옷가지와 진료 물품들을 챙겨 봉사활동 장소로 향했다. 우리 나라와 같이 출근 시간대에 교통 정체가 그리 심하지는 않지만, 예상치 못한 일들로 일정이 늦어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서둘러 아침을 챙겨먹고 진료소로 향했다. 처음 도착했을 땐 아침 일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인파가 몰려와 약간 당황했었다. 그러나 그 인파를 보고 열심히 하자고 서로를 독려하는 선배님들을 보니 그 당황감은 열심히 해 보자는 파이팅으로 바뀌어 있었다.
네팔의 의료 환경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네팔의 의학대학은 총 4개이며, 각 학교의 정원은 한 학년당 15~2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네팔의 인구가 우리 나라의 인구와 비슷한데, 인구 수에 비해 의사 수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사실 교회 바로 앞에 종합병원이 있기는 했지만, 의사 이름만 20명 정도 붙어있을 뿐, 진료는 1~2명 밖에 하고 있지 않았다. 실제로 네팔에서의 의사 월급은 약 200불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여러 군데에 자신을 등록시켜 놓고 하루에 1~2시간씩 일하는 식으로 일하는 의사가 많다고 한다.
카트만두에서 기억에 남는 환자는 12살 남자아이였다. 2년 전에 지붕에서 떨어져 왼쪽 팔꿈치를 다친 후 치료를 받지 못해 ㄱ자 모양으로 굳어버린 상태였다.. 자침 전에는 딱딱히 굳어서 전혀 움직이지 않던 팔이 자침 후 “침은 아프지만 팔 움직임은 훨씬 부드러워졌다”고 했다. 골절 후 뼈가 붙을 때 olecranon의 크기가 커져버려 아귀가 맞지 않아 더 이상의 호전은 오지 않았다. 보호자 말로는 현지 의사에게 보여주니 그냥 뜨거운 물에만 계속 담그라고 했다는 것이다. 보호자에게 지금은 다른 치료방법이 마땅치 않으니 꾸준히 운동이라도 시켜 주라고 이야기를 하였지만... 못내 아쉬움이 남고 안타까운 환자였다.
카트만두에서의 이틀의 의료봉사를 뒤로 하고 무글링으로 이동했다. 카트만두 → 무글링 → 포카라 → 인도 국경까지 이어지는 국도. 우리나라 경부선에서 신의주까지 이어지는 1번 국도와 같은 도로였다. 우리나라 경부선은 왕복 8~12차선이지만 이곳은 중앙선도 제대로 없는 2차선이었다. 그리고 납치사건이 많이 발생해서 지나가는 차마다 꼭 경찰이 차 안을 검문하니 어느 정도의 교통체증은 당연지사. 그러나 한국과 달리 불평하는 사람도, 경적을 울리며 짜증내는 자동차가 단 1대도 없다는 것이 신기했다. 게다가 꼬불꼬불 언덕길에 트럭 4대가 고장이 나서 차가 기어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Stuck in the middle" 차 안에 3시간동안 갇혀 있으니 온 몸이 찌뿌둥해 죽을 지경이었다. 바람도 쐘 겸 밖으로 나왔는데.. 와우!! 한국에선 볼 수 없었던 별천지와 은하수들!! 우리나라 하늘에서 별을 볼 수 없는 이유는 환경오염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또다른 이유는 바로 전기!! 네팔은 한국처럼 전기 사정이 좋지 않아서 저녁 6~8시까지는 전기 공급이 중단된다. 일부에서 자가 발전기를 돌리기는 하지만 한국에 비하면 새발의 피. 한국에서 귀성길 정체나 휴가철 정체때엔 짜증만 내며 투덜투덜 했을 나인데, 네팔에 와서 그런지 네팔 정서에 적응하여 차가 아무리 막혀도 이 상황을 더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또다른 ‘내’가 되어 있었다.
7시간의 긴 여정을 거쳐 (평소엔 3시간이면 되는 거리) 무글링 숙소에 도착해서 늦은 저녁을 11시경에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무글링에서는 총 환자 예상이 200명 정도밖에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늘 오후는 비교적 여유롭게 지낼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했다. 그러나 예상은 역시 예상일 뿐. ‘어? 지금쯤이면 끝나야 하는데?’ 진료가 빨리 끝나면 오후에는 무글링의 명물인 케이블카를 타 볼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던 나는.... 왠지 모르게 서글펴졌다. 그러나 우리 진료소에 오기 위해 산에서 몇시간을 걸어내려 온 환자들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우리가 놀러온 건 아니지 않느냐. 시간이 남아서 구경을 간다면 좋겠지만, 기다리는 환자들을 두고 가는건 도리가 아니지. 열심히 계속 진료합시다.” 진료부장님의 격려와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와주신 환자분들을 위해서 우리는 더 열심히 진료에 임했다.
무글링은 산악지형이어서 그런지 피부병 환자 비율이 엄청 많았다. 무글링에서만 약 500명의 환자가 홨는데 그중 200명 정도가 피부질환으로 가려움증, 통증을 호소했다. 넉넉하게 준비해 갔다고 생각했었던 연고도 무글링에서 거의 대부분 사용했지만 턱없이 부족해서 너무 아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죄송스러웠다.
결국 진료는 무사히 마쳤으나 케이블카 마감시간인 5시를 훌쩍 넘기고..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물론 우리는 아쉽긴 했지만 오늘도 무사히 진료를 끝냈다는 뿌듯함을 가지고 귀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장소협조를 해 주신 무글링 유지분께서 케이블카 회사에 전화를 하셨다. 케이블 카 3대를 특별히 빼 놓았으니 얼른 가서 타고 오라는 말이 이어졌다. 덕분에 멋진 경치를 감상할 수 있었다. 비록 정상에서 내려 둘러볼 시간도 없었고, 내려올땐 전기가 끊겨 약 10분 정도 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상황이 무섭긴 했지만, 무글링 주민들이 베풀어 준 호의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무글링에서 일정을 마치고 포카라로 이동하는 길. 만약 아침에 이동하면 절벽 위를 지나면서 멋진 경치를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역시 진료일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밤에 이동을 했다.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고 했던가. 밤에 이동하는 버스에도 낭만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한국을 떠난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지만 문득 노스텔지아를 느껴서일까. 진선두 원장님의 노래를 시작으로 남행열차, 아파트, 어머나, 찰랑찰랑, 찬찬찬, 호랑나비, 동요와 만화 주제가... 그러나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건 통역도우미 케이비와 실바 부부의 네팔 전통노래 ‘레쌍삐리리’. 이 노래의 뜻은 ‘날 수 있다’는 어깨가 들썩이는 노래인데 그 노래를 들으면서 왠지 우리 버스도 밤하늘 위로 날아가 버릴듯한 느낌이 들었다.
포카라에서는 김선하 원장님의 환자분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중풍 후유증 환자분이셨는데, 오른쪽 전체가 마비감과 구금불개 상태이셨고 환자가 걷기는 커녕 장정 2명에게 업혀 오신 환자분이셨다. 무려 2시간을 한 환자분께 투자하시더니, 오른쪽에 감각이 일부 돌아오고 못 움직이시던 턱도 약간 벌릴 수 있었다. 원장님께 연신 고마워하시던 보호자 분들을 보니, 힘든 일정속에서도 한의사로서의 자부심과 뿌듯함이 나도 모르게 솟구쳐 올랐다.
포카라.. 저녁 늦게까지의 진료에도 불구하고 늘 나를 아침 5시 반에 기상하게 만드는 신기한 곳이었다. 숙소에서 나와 무작정 한 곳으로만 걸었다. 벼 베는 농부들, 커피를 마시며 쉬고 있는 사람들, 태권도복을 입고 조깅하는 아이들, 짐을 머리에 이고 걷는 아낙, 집 앞에서 속옷 바람으로 아침 차 한잔을 하고 있는 사람들.. 이 모두가 “안나 푸르나”와 마차푸차“와 어우러져 한편의 멋진 수채화가 되었다. 특히 끝없이 펼쳐진 황금빛 논밭고 그 사이로 끝없이 이어진 길. 그리고 그 위의 장엄한 안나 푸르나.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 되어 내 머리에 영원히 박혀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빨리빨리’에만 떠밀려 살던 나에게 네팔은 문화적 충격 그 자체였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네팔을 가난한 ‘후진국’ 정도로만 생각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세계 최고의 에베레스트산과 1년에 4번 벼농사를 지을 수 있는 멋진 자연환경이 있는 곳 네팔. ‘삶의 질’이 높은 것 또한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KOMSTA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많이 알고 있었지만 기회가 닿지 않아 많이 아쉬웠었다. 그런데 1993년 1차 네팔 의료봉사를 기념하는 101차 네팔의료봉사에 참가하게 되어 감회가 더욱 새로웠던 것 같다. 더구나 한의사가 되고 나서 첫 해외의료봉사였기에 더욱더 뜻깊은 추억이 될 것이다. KOMSTA 창단때부터 애써주신 김규만 단장님 임일규 고문님, 김선하 원장님, 진료부장 이 인 원장님 등 이번 101회 의료봉사를 위해 애써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특히 젊은 한의사도 소화하기 힘든 빡빡한 일정이었는데, 노익장을 과시해 주신 임일규 고문님과 김선하 원장님께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한번 더 드리고 싶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고흥 보건소 소속으로 KOMSTA를 통해 한의학을 알릴 수 있어 더욱 뜻깊은 봉사활동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고흥에서 나로호를 쏘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았는데, 나로 인해 아름다운 고장 고흥을 조금이나마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생겼던 것에 대해 정말 감사하고 있다. 아울러 공중보건의로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해외 여행 허가를 내 주시기가 쉽지 않으셨을텐데, 인류애와 자비심, 너그러운 仁의 마음으로 흔쾌히 허락을 해 주신 박병종 고흥군수님과 김승용 계장님, 류점순 여사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