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차 베트남 의료봉사 후기
이번 의료봉사는 콤스타 의료봉사 경험이 있는 친한 친구의 추천으로 갑작스럽게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한의대 시절 여름방학 때마다 의료봉사를 갔었습니다. 이번 의료봉사는 해외에서 진행되고 친분이 있는 사람도 없어 염려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처음 인천공항에 모였을 때 다들 처음 뵙는 분이셨지만, 좋은 인상을 받고 값진 경험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6월 24일 저녁에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약 4시간 후에 베트남 다낭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공항에 내렸을 때 마주한 덥고 습한 공기에 베트남에 온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준비해간 의료물품이 통관되지 않았지만 통역을 맞은 응안 선생님 덕분에 크게 지체하지 않고 숙소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개소식을 마치고 C진료소(빈이앙Xa)에 배정되어 박성우 원장님과 진료를 시작하였습니다. C진료소는 그 지역의 보건소에 해당하는 곳이었지만 변변한 의료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첫 째 날은 아침부터 노인 분들의 내원이 줄을 이어서 100명 넘게 오셨습니다. 둘 째 날 부터는 초진에 재진환자까지 겹쳐 환자 수가 200명에 육박했습니다.
환자분들은 대부분이 요통, 슬통, 견통 등 근골격계의 불편함을 호소했습니다. 척박한 기후와 전쟁의 상처를 온 몸으로 안으면서도 감내하며 살아온 모습이 선량한 면면에 비춰졌습니다. 의료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해 아픔을 참고 지내왔을 분들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쉴 새 없이 밀려드는 환자와 덥고 습한 기후에 정신이 없을 정도였지만, 기다리는 분들을 보니 잠시도 쉴 수 없어 열심히 진료에 매진했습니다.
준비해간 의료물품으로 최선을 다하는 마음으로 진료해 드리려고 했습니다. 다 낫게 해드릴 수는 없어도 한번이라도 더 만져드리고 한 곳이라도 더 봐드리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더운 기후 탓에 오후가 되면 다짐이 흐트러지고 관성에 젖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서포트 해주시며 같이 고생한 황정현 국장님과 전미선 선생님, 진료보조까지 맡은 통역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재진 받으러 오셨을 때 좋아졌다며 밝게 웃는 분들도 진료에 힘이 되었습니다. 야위고 그을리고 주름졌지만 고마운 마음이 담긴 선한 미소를 보니 오히려 제가 힐링 받는 기분이었습니다.
진료를 마치고 마지막 날은 짧게나마 다낭시를 둘러 볼 수 있었습니다. 외침을 받고 극복해온 역사가 한국과 공통점이 많아 베트남의 문화가 친근하게 다가왔습니다. 전쟁의 영향으로 젊은이의 인구가 60%를 넘어 이들이 베트남의 미래라고 합니다. 진심으로 베트남의 발전이 더 이뤄져서, 특히 의료혜택이 벽지의 노인 분들에게도 돌아가기를 바랬습니다.
최근 한류 열풍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나라가 베트남이라고 합니다. 통역학생들에게서도 한국에 대한 우호적인 인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지속적인 한류와 양국의 우호관계를 위해서는 일방적인 전파가 아닌 쌍방적 교류로 넓혀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에 월의학을 한 동의들에게 동의보감 영역본을 전달했듯 우리도 베트남의 좋은 자료를 받아들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또한 베트남전이 치열했던 중부 지역을 돌아보니 양국간 현대사의 앙금 해소를 위해 노력하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콤스타의 의료봉사 활동이 한편으로는 한류에 일조하고, 한편으로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아픈 현대사 치유에 일조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많은 환자와 더운 기후에 끝나고 나면 홀가분하겠지 생각했는데 막상 일정이 끝나고 나니 많이 아쉬웠습니다. 다음번에도 마음을 내어 다시 의료봉사를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진료하느라 힘든 일정 속에서도 많은 것을 가르쳐주시고 좋은 말씀 많이 해주신 이강욱 원장님, 김계진 단장님, 박성우 원장님, 송경훈 원장님, 윤진원 원장님, 전준영 원장님, 김태정 원장님, 이지원 원장님께 감사드립니다. 뒤에서 묵묵히 고생하신 황정현 국장님, 전미선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통역하랴 진료보조하랴 고생하신 응언 선생님, 응아 교수님이하 통역학생 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 때 그 곳의 날씨는 덥고 습했지만 그 때 그 곳의 기억은 어느 여름날 꺼내 봐도 기분 좋을 청량한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제102차 베트남 의료봉사 후기
이번 의료봉사는 콤스타 의료봉사 경험이 있는 친한 친구의 추천으로 갑작스럽게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한의대 시절 여름방학 때마다 의료봉사를 갔었습니다. 이번 의료봉사는 해외에서 진행되고 친분이 있는 사람도 없어 염려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처음 인천공항에 모였을 때 다들 처음 뵙는 분이셨지만, 좋은 인상을 받고 값진 경험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6월 24일 저녁에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약 4시간 후에 베트남 다낭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공항에 내렸을 때 마주한 덥고 습한 공기에 베트남에 온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준비해간 의료물품이 통관되지 않았지만 통역을 맞은 응안 선생님 덕분에 크게 지체하지 않고 숙소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개소식을 마치고 C진료소(빈이앙Xa)에 배정되어 박성우 원장님과 진료를 시작하였습니다. C진료소는 그 지역의 보건소에 해당하는 곳이었지만 변변한 의료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첫 째 날은 아침부터 노인 분들의 내원이 줄을 이어서 100명 넘게 오셨습니다. 둘 째 날 부터는 초진에 재진환자까지 겹쳐 환자 수가 200명에 육박했습니다.
환자분들은 대부분이 요통, 슬통, 견통 등 근골격계의 불편함을 호소했습니다. 척박한 기후와 전쟁의 상처를 온 몸으로 안으면서도 감내하며 살아온 모습이 선량한 면면에 비춰졌습니다. 의료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해 아픔을 참고 지내왔을 분들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쉴 새 없이 밀려드는 환자와 덥고 습한 기후에 정신이 없을 정도였지만, 기다리는 분들을 보니 잠시도 쉴 수 없어 열심히 진료에 매진했습니다.
준비해간 의료물품으로 최선을 다하는 마음으로 진료해 드리려고 했습니다. 다 낫게 해드릴 수는 없어도 한번이라도 더 만져드리고 한 곳이라도 더 봐드리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더운 기후 탓에 오후가 되면 다짐이 흐트러지고 관성에 젖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서포트 해주시며 같이 고생한 황정현 국장님과 전미선 선생님, 진료보조까지 맡은 통역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재진 받으러 오셨을 때 좋아졌다며 밝게 웃는 분들도 진료에 힘이 되었습니다. 야위고 그을리고 주름졌지만 고마운 마음이 담긴 선한 미소를 보니 오히려 제가 힐링 받는 기분이었습니다.
진료를 마치고 마지막 날은 짧게나마 다낭시를 둘러 볼 수 있었습니다. 외침을 받고 극복해온 역사가 한국과 공통점이 많아 베트남의 문화가 친근하게 다가왔습니다. 전쟁의 영향으로 젊은이의 인구가 60%를 넘어 이들이 베트남의 미래라고 합니다. 진심으로 베트남의 발전이 더 이뤄져서, 특히 의료혜택이 벽지의 노인 분들에게도 돌아가기를 바랬습니다.
최근 한류 열풍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나라가 베트남이라고 합니다. 통역학생들에게서도 한국에 대한 우호적인 인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지속적인 한류와 양국의 우호관계를 위해서는 일방적인 전파가 아닌 쌍방적 교류로 넓혀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에 월의학을 한 동의들에게 동의보감 영역본을 전달했듯 우리도 베트남의 좋은 자료를 받아들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또한 베트남전이 치열했던 중부 지역을 돌아보니 양국간 현대사의 앙금 해소를 위해 노력하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콤스타의 의료봉사 활동이 한편으로는 한류에 일조하고, 한편으로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아픈 현대사 치유에 일조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많은 환자와 더운 기후에 끝나고 나면 홀가분하겠지 생각했는데 막상 일정이 끝나고 나니 많이 아쉬웠습니다. 다음번에도 마음을 내어 다시 의료봉사를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진료하느라 힘든 일정 속에서도 많은 것을 가르쳐주시고 좋은 말씀 많이 해주신 이강욱 원장님, 김계진 단장님, 박성우 원장님, 송경훈 원장님, 윤진원 원장님, 전준영 원장님, 김태정 원장님, 이지원 원장님께 감사드립니다. 뒤에서 묵묵히 고생하신 황정현 국장님, 전미선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통역하랴 진료보조하랴 고생하신 응언 선생님, 응아 교수님이하 통역학생 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 때 그 곳의 날씨는 덥고 습했지만 그 때 그 곳의 기억은 어느 여름날 꺼내 봐도 기분 좋을 청량한 추억으로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