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벡, 그곳에 한의학 신뢰를 심다
한국의 한의사들이 2012년 들어 두 번째로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했다. 돈 많은 한의사들의 단체 해외여행이냐고? 잘못 짚었다. 이들은 한의사협회 회원으로 구성된 대한한방해외의료봉사단인 KOMSTA 회원들이다. 평균 기온이 한창 40도를 웃돌던 2012년 여름, 그토록 고생한 기억을 그새 까먹고, 이번엔 때마침 영하권으로 떨어진 우즈베키스탄 땅을 다시 밟은 것이다. 12월15일부터 3일간 이들은 한-우 친선한방병원 및 아리랑요양원에서 의료봉사활동을 벌였고, 나는 KOICA 봉사단원이자 한-우 친선한방병원의 일원으로 이들과 함께 의료봉사활동에 참여했다.
KOMSTA팀이 온다는 소식에 한방병원 식구들과 나는 일찌감치 공항으로 향했다. 지난 방문과 달리 이번엔 제발 무사히 세관을 빠져 나오길 바라며. 한국 대사관에선 이번에도 우리보다 먼저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지난 방문의 고난을 말해주듯 우즈베키스탄 보건복지부 장관까지 대동해서 말이다. 그 덕에 KOMSTA는 다행히 세관을 무사히 통과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우즈베키스탄 공항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짐을 찾는 데만 2시간이 걸린 것이다. 그렇게 우즈베키스탄은 매서운 추위와 함께 KOMSTA팀을 혹독하게 맞이해 주고 있었다.
진솔함 잃지 않고 따뜻히 진료해 주신 원장님들
진료는 도착 다음 날 오전부터 바로 시작됐다. 방 안의 차디찬 아침 공기 때문에 어렵사리 이불에서 빠져나온 나는 제일 먼저 창 밖을 내다봤다. ‘하얗다….’ 평소 같으면 눈 덮인 멋진 풍경에 감탄이 절로 나왔겠지만 오늘은 의료봉사 첫째 날. 치료받으러 오실 어르신들 걱정이 앞섰다. 허겁지겁 병원에 도착하니 벌써 대기실은 이미 환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눈이 많이 와서 환자들이 별로 없을 줄 알고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우리 한방병원에서는 치료를 원하는 분들이 너무 많아 1년에 한번 날짜를 정해서 1년치 접수를 받고 있다. 그래서 치료를 받고 싶은 시기에 받지 못하는 분들은 의료봉사단의 방문을 엄청 반기신다. 한-우 친선한방병원에는 KOMSTA 단장이신 강동철 원장님을 비롯해 7명의 한의사들이 진료를 하고, 아리랑요양원에서는 4명의 한의사들을 비롯해 몇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함께 했다.
뭐든 처음 시작이 힘들 듯, 첫째 날이 제일 정신없다. 서로 처음보는 사람들끼리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어떻게 진행이 되는지 익숙해지는데도 시간이 걸린다. 오전에는 접수부터 진료, 약국까지 우왕좌왕 했다. 약국에서 약을 나눠주던 나는 진료를 끝내신 아주머니의 목 아래쪽 부분 옷이 볼록하게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상한 생각에 자세히 살폈더니 침 하나가 그대로 꽂혀있는 것이 아닌가. 나와 봉사자들은 너무나 놀란 동시에 미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아주머니께서는 호탕하게 한 번 웃으시는 게 아닌가. ‘그럴 수도 있지’라며 넉넉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이다. 아주머니의 그 넉넉한 미소에 우리도 여유를 찾았던 것일까, 오후 진료부터는 베테랑 봉사자들의 진면모를 펼칠 수 있었다.
둘째 날 역시 날씨는 조금도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어르신들이 눈길에 미끄러지지나 않을까 걱정이었다. 둘째 날은 환자의 종류가 크게 2가지로 나뉜다. 초진 환자와 재진 환자. 재진 환자분의 경우, 전날 진료받은 의사선생님에게 진료를 받아야 하므로 자신보다 늦게 온 초진 환자에게 진료 순서를 양보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하지만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환자들이 꽤 있다. 내가 번호를 부를 때마다 본인이 먼저 왔는데 왜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가느냐고 여기저기서 한 마디씩 말이 나오기 시작했고, 안면을 익힌 몇몇 분들은 순번표를 들고 내게 와서는 먼저 들어가게 해달라며 애절한 눈빛을 보내시기도 했다.
한의사 선생님들은 둘째 날, 재진 환자에 초진까지 진료해야 하니 전날보다 더 바쁜 하루를 보내야 했다. 사정은 알지만 나로선 오래 기다린 환자들을 빨리 치료해 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한의사 선생님들을 쉬게 놔둘 수가 없었다. 환자 자리가 비는 진료실은 무조건 환자부터 넣고 봤다. 어느 순간부터는 “다음 환자 보시겠어요?” 라는 말과 함께 내가 진료실 문을 빼꼼히 열면 다들 그냥 고개만 끄덕이셨다. 사람이다 보니 지칠 수밖에…. 이날 유난히 환자를 많이 배정해드린 두 한의사 선생님께 조금 죄송한 마음도 든다. 그러나 끝까지 환자에게만은 진솔함을 잃지 않고 따뜻하게 진료해 주신 한의사 선생님들. ‘봉사의 참맛이란 이런 것이구나’를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짧은 기간동안 ‘몸이 가벼워진 것 같다’ 말씀
마지막 날에는 환자 수가 200명이 넘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사흘이 지나 어느새 의료봉사활동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KOMSTA가 돌아갈 날이 되니 날씨가 조금씩 풀리는 것이 아닌가.
마지막 날, KOMSTA팀과 한방병원 식구들은 대사관 오찬에 초대를 받았다. 오찬 참석을 위해 오전 진료를 조금 이른 시간에 끝내야 했다. 괜히 마음이 급해진 나는 환자분들 진료 배정을 서둘렀다. 한 명이라도 더 진료를 받게 하려 애쓰는 도중, 아주머니 한 분이 진료실로 그냥 들어가는 모습이 내 예민해진 레이더망에 포착됐다.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아주머니께서는 환자를 찾으러 들어왔는데 왜 화를 내냐며 버럭 하셨다.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순간 멋쩍어진 나는 바로 사과를 드리고, 급한 마음부터 진정시켰다.
한의학이 마술도 아니고 한두 번 침 치료만으로 그 효과를 당장 실감한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어르신들은 짧은 치료 기간 동안 ‘몸이 많이 좋아졌다’, ‘몸이 가벼워진 것 같다’고들 하신다. 그러면서 연신 한의사 선생님들께 감사를 표하셨다. 절로 흐뭇해지는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나라도, 언어도 낯선 저 멀리 한국이라는 땅에서 온 한의사선생님들.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에겐 통역까지 대동해 본인들의 아픔을 들어주고, 보듬어 준 타국 한의사들의 사랑의 온기가 더 큰 치료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대사관 오찬 후, 마지막 날 오후 진료가 시작됐다. 다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는 걸 아시고는 ‘왜 이렇게 짧게 오냐?’, ‘또 언제 오냐?’ 하시며 아쉬움을 드러내셨다. 고마움에 마지막 날에는 한 손에 선물을 들고 오시는 분들도 많으셨다. 외국어로는 표현이 잘 되지 않는 한국인 특유의 정서인 ‘情’. 이곳 우즈베키스탄에서, 한-우 친선한방병원에 있으면서 환자분들한테서도 참 많이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3일간의 의료봉사활동은 끝이 났다.
나는 올해 들어서만 3번의 의료봉사활동을 가졌다. 벌써 우즈베키스탄에 온 지도 1년 반. 떠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물리치료학 처음 강의를 들을 때 교수님께서 그러셨다. “P.T (Physiotherapist)는 항상 p.t (positive thinking)을 가지고 P.t (Patient)를 봐야 한다.” 비단 물리치료사에게만 적용되는 말은 아니지만 항상 이 말을 염두하고 환자분들을 대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돌이켜보면 나에겐 참 어려운 일이었던 것 같다. 환자분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일희일비하는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은 혹여나 내 안 좋은 이 에너지가 환자분들에게 전해질까 물리치료기기만 붙이고 끝내는 날도 많았던 듯하다.
3월, 8월, 그리고 12월. 참 적절한 시기에 의료봉사활동을 가짐으로써 나 스스로에게도 다시 마음을 다잡는 기회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의료봉사활동에 도움을 준 KOICA 단원들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아무리 코리안드림을 외치며 한국에 우호적인 우즈벡인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한의학을 신뢰하고 치료받고자 하는 우즈벡인들이 많은 건 아마도 한-우 친선한방병원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감히 말해본다.
우즈벡, 그곳에 한의학 신뢰를 심다
한국의 한의사들이 2012년 들어 두 번째로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했다. 돈 많은 한의사들의 단체 해외여행이냐고? 잘못 짚었다. 이들은 한의사협회 회원으로 구성된 대한한방해외의료봉사단인 KOMSTA 회원들이다. 평균 기온이 한창 40도를 웃돌던 2012년 여름, 그토록 고생한 기억을 그새 까먹고, 이번엔 때마침 영하권으로 떨어진 우즈베키스탄 땅을 다시 밟은 것이다. 12월15일부터 3일간 이들은 한-우 친선한방병원 및 아리랑요양원에서 의료봉사활동을 벌였고, 나는 KOICA 봉사단원이자 한-우 친선한방병원의 일원으로 이들과 함께 의료봉사활동에 참여했다.
KOMSTA팀이 온다는 소식에 한방병원 식구들과 나는 일찌감치 공항으로 향했다. 지난 방문과 달리 이번엔 제발 무사히 세관을 빠져 나오길 바라며. 한국 대사관에선 이번에도 우리보다 먼저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지난 방문의 고난을 말해주듯 우즈베키스탄 보건복지부 장관까지 대동해서 말이다. 그 덕에 KOMSTA는 다행히 세관을 무사히 통과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우즈베키스탄 공항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짐을 찾는 데만 2시간이 걸린 것이다. 그렇게 우즈베키스탄은 매서운 추위와 함께 KOMSTA팀을 혹독하게 맞이해 주고 있었다.
진솔함 잃지 않고 따뜻히 진료해 주신 원장님들
진료는 도착 다음 날 오전부터 바로 시작됐다. 방 안의 차디찬 아침 공기 때문에 어렵사리 이불에서 빠져나온 나는 제일 먼저 창 밖을 내다봤다. ‘하얗다….’ 평소 같으면 눈 덮인 멋진 풍경에 감탄이 절로 나왔겠지만 오늘은 의료봉사 첫째 날. 치료받으러 오실 어르신들 걱정이 앞섰다. 허겁지겁 병원에 도착하니 벌써 대기실은 이미 환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눈이 많이 와서 환자들이 별로 없을 줄 알고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우리 한방병원에서는 치료를 원하는 분들이 너무 많아 1년에 한번 날짜를 정해서 1년치 접수를 받고 있다. 그래서 치료를 받고 싶은 시기에 받지 못하는 분들은 의료봉사단의 방문을 엄청 반기신다. 한-우 친선한방병원에는 KOMSTA 단장이신 강동철 원장님을 비롯해 7명의 한의사들이 진료를 하고, 아리랑요양원에서는 4명의 한의사들을 비롯해 몇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함께 했다.
뭐든 처음 시작이 힘들 듯, 첫째 날이 제일 정신없다. 서로 처음보는 사람들끼리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어떻게 진행이 되는지 익숙해지는데도 시간이 걸린다. 오전에는 접수부터 진료, 약국까지 우왕좌왕 했다. 약국에서 약을 나눠주던 나는 진료를 끝내신 아주머니의 목 아래쪽 부분 옷이 볼록하게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상한 생각에 자세히 살폈더니 침 하나가 그대로 꽂혀있는 것이 아닌가. 나와 봉사자들은 너무나 놀란 동시에 미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아주머니께서는 호탕하게 한 번 웃으시는 게 아닌가. ‘그럴 수도 있지’라며 넉넉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이다. 아주머니의 그 넉넉한 미소에 우리도 여유를 찾았던 것일까, 오후 진료부터는 베테랑 봉사자들의 진면모를 펼칠 수 있었다.
둘째 날 역시 날씨는 조금도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어르신들이 눈길에 미끄러지지나 않을까 걱정이었다. 둘째 날은 환자의 종류가 크게 2가지로 나뉜다. 초진 환자와 재진 환자. 재진 환자분의 경우, 전날 진료받은 의사선생님에게 진료를 받아야 하므로 자신보다 늦게 온 초진 환자에게 진료 순서를 양보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하지만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환자들이 꽤 있다. 내가 번호를 부를 때마다 본인이 먼저 왔는데 왜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가느냐고 여기저기서 한 마디씩 말이 나오기 시작했고, 안면을 익힌 몇몇 분들은 순번표를 들고 내게 와서는 먼저 들어가게 해달라며 애절한 눈빛을 보내시기도 했다.
한의사 선생님들은 둘째 날, 재진 환자에 초진까지 진료해야 하니 전날보다 더 바쁜 하루를 보내야 했다. 사정은 알지만 나로선 오래 기다린 환자들을 빨리 치료해 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한의사 선생님들을 쉬게 놔둘 수가 없었다. 환자 자리가 비는 진료실은 무조건 환자부터 넣고 봤다. 어느 순간부터는 “다음 환자 보시겠어요?” 라는 말과 함께 내가 진료실 문을 빼꼼히 열면 다들 그냥 고개만 끄덕이셨다. 사람이다 보니 지칠 수밖에…. 이날 유난히 환자를 많이 배정해드린 두 한의사 선생님께 조금 죄송한 마음도 든다. 그러나 끝까지 환자에게만은 진솔함을 잃지 않고 따뜻하게 진료해 주신 한의사 선생님들. ‘봉사의 참맛이란 이런 것이구나’를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마지막 날에는 환자 수가 200명이 넘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사흘이 지나 어느새 의료봉사활동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KOMSTA가 돌아갈 날이 되니 날씨가 조금씩 풀리는 것이 아닌가.
마지막 날, KOMSTA팀과 한방병원 식구들은 대사관 오찬에 초대를 받았다. 오찬 참석을 위해 오전 진료를 조금 이른 시간에 끝내야 했다. 괜히 마음이 급해진 나는 환자분들 진료 배정을 서둘렀다. 한 명이라도 더 진료를 받게 하려 애쓰는 도중, 아주머니 한 분이 진료실로 그냥 들어가는 모습이 내 예민해진 레이더망에 포착됐다.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아주머니께서는 환자를 찾으러 들어왔는데 왜 화를 내냐며 버럭 하셨다.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순간 멋쩍어진 나는 바로 사과를 드리고, 급한 마음부터 진정시켰다.
한의학이 마술도 아니고 한두 번 침 치료만으로 그 효과를 당장 실감한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어르신들은 짧은 치료 기간 동안 ‘몸이 많이 좋아졌다’, ‘몸이 가벼워진 것 같다’고들 하신다. 그러면서 연신 한의사 선생님들께 감사를 표하셨다. 절로 흐뭇해지는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나라도, 언어도 낯선 저 멀리 한국이라는 땅에서 온 한의사선생님들.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에겐 통역까지 대동해 본인들의 아픔을 들어주고, 보듬어 준 타국 한의사들의 사랑의 온기가 더 큰 치료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대사관 오찬 후, 마지막 날 오후 진료가 시작됐다. 다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는 걸 아시고는 ‘왜 이렇게 짧게 오냐?’, ‘또 언제 오냐?’ 하시며 아쉬움을 드러내셨다. 고마움에 마지막 날에는 한 손에 선물을 들고 오시는 분들도 많으셨다. 외국어로는 표현이 잘 되지 않는 한국인 특유의 정서인 ‘情’. 이곳 우즈베키스탄에서, 한-우 친선한방병원에 있으면서 환자분들한테서도 참 많이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3일간의 의료봉사활동은 끝이 났다.
나는 올해 들어서만 3번의 의료봉사활동을 가졌다. 벌써 우즈베키스탄에 온 지도 1년 반. 떠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물리치료학 처음 강의를 들을 때 교수님께서 그러셨다. “P.T (Physiotherapist)는 항상 p.t (positive thinking)을 가지고 P.t (Patient)를 봐야 한다.” 비단 물리치료사에게만 적용되는 말은 아니지만 항상 이 말을 염두하고 환자분들을 대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돌이켜보면 나에겐 참 어려운 일이었던 것 같다. 환자분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일희일비하는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은 혹여나 내 안 좋은 이 에너지가 환자분들에게 전해질까 물리치료기기만 붙이고 끝내는 날도 많았던 듯하다.
3월, 8월, 그리고 12월. 참 적절한 시기에 의료봉사활동을 가짐으로써 나 스스로에게도 다시 마음을 다잡는 기회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의료봉사활동에 도움을 준 KOICA 단원들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아무리 코리안드림을 외치며 한국에 우호적인 우즈벡인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한의학을 신뢰하고 치료받고자 하는 우즈벡인들이 많은 건 아마도 한-우 친선한방병원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감히 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