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년 113차 스리랑카 의료봉사 후기 - 양희태한의사(울산, 학성한의원 원장)
리디가마의 하늘은 뜨거웠다. 두 달을 준비해서 이틀 동안 달려간 스리랑카 중부지방의 한적한 시골마을. 거기에서 울산한의사회 회원으로 구성된 KOMSTA(대한한방해외의료봉사단) 제113차 해외의료봉사단은 지난 7월 24일부터 8월1일까지 8박9일 동안 3800여명의 환자 진료와 k-문화를 소개하고 돌아왔다.
이번 봉사활동은 김부환 단장(동국한의원, 8회)을 비롯한 11명의 한의사와 22명의 가족 봉사자, 행정요원 2명, 그리고 취재를 맡은 ubc예재삼 pd(23회) 등 모두 36명으로 구성되었다. 울산한의사회 회원만으로 단독 봉사단을 꾸린 것은 지난 2003년의 인도와 2007년의 카자흐스탄에 이어 이번이 3번째이다. 특히 지난 100회 이후에는 가족을 동반할 수가 있어 이번에 22명의 원장 가족들이 함께 참여하였다. 그러기에 단단한 봉사단의 팀웍은 스리랑카의 더위를 날리기에 충분 하였고 36명의 단원이 한몸 같이 움직이며 더욱 양질의 봉사를 펼칠 수 있었다.
봉사지역이 열악한 시골이라 단원 전체가 묵을 숙소가 없는 관계로 야파후와(yahahuwa)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40분 거리의 쿰부케테(kumbukgette)와 1시간 10분 거리의 리디가마(ridigama) 두 곳에 진료소를 열었다. 단장을 제외한 5명씩의 진료원장과 가족봉사단도 나눠짐은 물론이다.
미비한 도로사정으로 콜롬보에서 80km 떨어진 거리를 4시간 넘게 걸려 2진료소가 설치될 리디가마에 도착한 봉사단. 동사무소 같은 행정건물의 회의실에서 점심을 먹는데 밥 먹는 것부터가 전투의 시작이었다. 도시락만 덜렁 나눠주고 수저가 없다. 스리랑카 현지식으로 손가락으로 집어 먹으란다. 그것도 왼손으로 우아하게. 긴장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원래 예정된 진료소 환경이 너무 열악하여 옆에 있는 병원 한동을 빌렸는데 병원이라지만 치료기구나 물품은 보이지 않고 마치 시골학교 교실 같은 분위기였다. 그나마 하늘이 덥히고 전기가 들어오며 진료용 베드가 있는 게 어디인가? 1500년 된 카사가라(kasagala)절 강당에 차려진 1진료소는 더 어려운 여건이었다. 긴 널빤지로 만든 나무의자 3개를 붙여놓고 그 위에 담요를 깔아 만든 간이침대 높이가 너무 낮아 원장들이 허리를 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야전 경험이 많은 베테랑 원장들의 지휘로 진료소는 종이 펴듯 만들어지고 아침부터 기다렸다는 환자들을 위해 숨 돌릴 틈도 없이 진료를 시작했다. 다행인 것은 2005년에 파견되어 지금껏 현지봉사와 스리랑카 침구사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한규언 원장을 비롯하여 대학생들로 구성된 12명의 KOICA(한국국제협력단) 단원 그리고 9명의 SKAMST(스리랑카침구봉사단)는 우리의 든든한 힘이 되었다. SKAMST는 6년간 교육을 받는 스리랑카 전통의사들 중에 국립병원이나 정부기관에 근무하면서 한규언 원장에게 1년간 침구학을 배운 일명 ‘스리랑카 침구사’를 말한다. 이들을 만드는 프로젝트는 단순히 의료시술을 베풀거나 의료기자재를 전달하는 단편적 봉사를 떠나 현지에 한의학을 전수한다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도 상대국 정부의 공인 하에서는 더욱.
진료소 마다 진료원장, KOICA단원, SKAMST회원, 가족봉사자들이 각자 맡은 소임에 따라 땀을 훔칠 여유도 없이 바삐 움직여야 했다. 진료 이틀째부터는 새벽 6시에 시작된 줄이 병원 입구까지 길게 늘어섰고 점심도 돌아가며 먹어야 할 정도였다. 의료시설이나 위생개념이 부족한 스리랑카의 시골이다 보니 환자들은 대부분 40대 이상의 중장년층이고 천식, 두통, 소화기 병이 많았다. 특히 맨발로 생활하는 습관으로 허리와 무릎 통증환자가 많고 발바닥이 두껍고 갈라진 상태가 대부분이었다. 치료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신발부터 신겨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몰려드는 환자로 하루 평균 100명 이상을 치료해야 하는 피곤을 무릅쓰고 진료 3일째 저녁에는 9명의 SKAMST들과 세미나를 가졌다. 이번 봉사단의 좌장이었던 김승규 원장(선재한의원, 6회)이 영문으로 된 별도의 자료집을 준비해서 우리나라 한의사들이 사용하는 다양한 침법을 소개한 것이다.
입소문으로 진료실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와중에도 한쪽에서는 ‘한복입고 즉석 사진찍기’, ‘풍선아트’, ‘페이스페인팅’, ‘종이접기’ 등으로 k-문화를 전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특히 현지 학교환경 개선사업으로 벌인 벽화그리기는 큰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밑그림 없이 그린 그림이었지만 춤추는 고래그림은 반구대 암각화의 후예임을 유감없이 발휘한 명작이었다.
진료 마지막 날 오전에 이미 가져간 약품이 바닥났음에도 불구하고 길게 늘어 선 줄을 보고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손이라도 잡아주고 한 물품이라도 챙겨 줄 것이 없나 해서 뒤지는 봉사단의 모습은 치료이전에 사랑의 실천, 아낌없는 보시 그대로였다.
이번 봉사단은 한도시의 단일팀으로 가족이 함께 하며 k-문화까지 전달했다는데 더 큰 의의가 있었다. 그래서 함께한 모두가 한마음으로 하나가 되었다. 나라도 국경도 인종도 나눔은 없었다. 그래서 코리아와 랑카는 코리랑카로 하나가 되었다. 마치 코끼리 등에 올라탄 고래가 춤을 추듯.
2012년 113차 스리랑카 의료봉사 후기 - 양희태한의사(울산, 학성한의원 원장)
리디가마의 하늘은 뜨거웠다. 두 달을 준비해서 이틀 동안 달려간 스리랑카 중부지방의 한적한 시골마을. 거기에서 울산한의사회 회원으로 구성된 KOMSTA(대한한방해외의료봉사단) 제113차 해외의료봉사단은 지난 7월 24일부터 8월1일까지 8박9일 동안 3800여명의 환자 진료와 k-문화를 소개하고 돌아왔다.
이번 봉사활동은 김부환 단장(동국한의원, 8회)을 비롯한 11명의 한의사와 22명의 가족 봉사자, 행정요원 2명, 그리고 취재를 맡은 ubc예재삼 pd(23회) 등 모두 36명으로 구성되었다. 울산한의사회 회원만으로 단독 봉사단을 꾸린 것은 지난 2003년의 인도와 2007년의 카자흐스탄에 이어 이번이 3번째이다. 특히 지난 100회 이후에는 가족을 동반할 수가 있어 이번에 22명의 원장 가족들이 함께 참여하였다. 그러기에 단단한 봉사단의 팀웍은 스리랑카의 더위를 날리기에 충분 하였고 36명의 단원이 한몸 같이 움직이며 더욱 양질의 봉사를 펼칠 수 있었다.
봉사지역이 열악한 시골이라 단원 전체가 묵을 숙소가 없는 관계로 야파후와(yahahuwa)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40분 거리의 쿰부케테(kumbukgette)와 1시간 10분 거리의 리디가마(ridigama) 두 곳에 진료소를 열었다. 단장을 제외한 5명씩의 진료원장과 가족봉사단도 나눠짐은 물론이다.
미비한 도로사정으로 콜롬보에서 80km 떨어진 거리를 4시간 넘게 걸려 2진료소가 설치될 리디가마에 도착한 봉사단. 동사무소 같은 행정건물의 회의실에서 점심을 먹는데 밥 먹는 것부터가 전투의 시작이었다. 도시락만 덜렁 나눠주고 수저가 없다. 스리랑카 현지식으로 손가락으로 집어 먹으란다. 그것도 왼손으로 우아하게. 긴장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원래 예정된 진료소 환경이 너무 열악하여 옆에 있는 병원 한동을 빌렸는데 병원이라지만 치료기구나 물품은 보이지 않고 마치 시골학교 교실 같은 분위기였다. 그나마 하늘이 덥히고 전기가 들어오며 진료용 베드가 있는 게 어디인가? 1500년 된 카사가라(kasagala)절 강당에 차려진 1진료소는 더 어려운 여건이었다. 긴 널빤지로 만든 나무의자 3개를 붙여놓고 그 위에 담요를 깔아 만든 간이침대 높이가 너무 낮아 원장들이 허리를 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야전 경험이 많은 베테랑 원장들의 지휘로 진료소는 종이 펴듯 만들어지고 아침부터 기다렸다는 환자들을 위해 숨 돌릴 틈도 없이 진료를 시작했다. 다행인 것은 2005년에 파견되어 지금껏 현지봉사와 스리랑카 침구사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한규언 원장을 비롯하여 대학생들로 구성된 12명의 KOICA(한국국제협력단) 단원 그리고 9명의 SKAMST(스리랑카침구봉사단)는 우리의 든든한 힘이 되었다. SKAMST는 6년간 교육을 받는 스리랑카 전통의사들 중에 국립병원이나 정부기관에 근무하면서 한규언 원장에게 1년간 침구학을 배운 일명 ‘스리랑카 침구사’를 말한다. 이들을 만드는 프로젝트는 단순히 의료시술을 베풀거나 의료기자재를 전달하는 단편적 봉사를 떠나 현지에 한의학을 전수한다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도 상대국 정부의 공인 하에서는 더욱.
진료소 마다 진료원장, KOICA단원, SKAMST회원, 가족봉사자들이 각자 맡은 소임에 따라 땀을 훔칠 여유도 없이 바삐 움직여야 했다. 진료 이틀째부터는 새벽 6시에 시작된 줄이 병원 입구까지 길게 늘어섰고 점심도 돌아가며 먹어야 할 정도였다. 의료시설이나 위생개념이 부족한 스리랑카의 시골이다 보니 환자들은 대부분 40대 이상의 중장년층이고 천식, 두통, 소화기 병이 많았다. 특히 맨발로 생활하는 습관으로 허리와 무릎 통증환자가 많고 발바닥이 두껍고 갈라진 상태가 대부분이었다. 치료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신발부터 신겨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몰려드는 환자로 하루 평균 100명 이상을 치료해야 하는 피곤을 무릅쓰고 진료 3일째 저녁에는 9명의 SKAMST들과 세미나를 가졌다. 이번 봉사단의 좌장이었던 김승규 원장(선재한의원, 6회)이 영문으로 된 별도의 자료집을 준비해서 우리나라 한의사들이 사용하는 다양한 침법을 소개한 것이다.
입소문으로 진료실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와중에도 한쪽에서는 ‘한복입고 즉석 사진찍기’, ‘풍선아트’, ‘페이스페인팅’, ‘종이접기’ 등으로 k-문화를 전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특히 현지 학교환경 개선사업으로 벌인 벽화그리기는 큰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밑그림 없이 그린 그림이었지만 춤추는 고래그림은 반구대 암각화의 후예임을 유감없이 발휘한 명작이었다.
진료 마지막 날 오전에 이미 가져간 약품이 바닥났음에도 불구하고 길게 늘어 선 줄을 보고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손이라도 잡아주고 한 물품이라도 챙겨 줄 것이 없나 해서 뒤지는 봉사단의 모습은 치료이전에 사랑의 실천, 아낌없는 보시 그대로였다.
이번 봉사단은 한도시의 단일팀으로 가족이 함께 하며 k-문화까지 전달했다는데 더 큰 의의가 있었다. 그래서 함께한 모두가 한마음으로 하나가 되었다. 나라도 국경도 인종도 나눔은 없었다. 그래서 코리아와 랑카는 코리랑카로 하나가 되었다. 마치 코끼리 등에 올라탄 고래가 춤을 추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