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101차 네팔-김규만 단원#1

콤스타
2020-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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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MSTA가 STAR가 된 이야기-1 미래가 우연이라면 과거는 반드시 필연이 된다!


인생은 알 수 없는 우연(偶然)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필연(必然)이라고 한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 속에 다가올 미래가 우연이라면 지나간 과거는 필연이라는 인과(因果)관계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우연이 필연이 되는 변화의 순간이 바로 현재이다. 지금부터 18년 전 나의 머리 속에 바람처럼 스치고 구름처럼 머물렀던 우연한 생각과 꿈이 있었다. 그러한 우연한 생각과 꿈이 모여서 물리적인 결합을 하고 화학적인 변화를 일으키면서 필연을 낳았다.

1991년 한국동계에베레스트원정대에 우수한(!) 대원 겸 팀 닥터로 선발되어 다녀온 후 우연한 인연이 나를 이끌고 있었다. 그들과 약속했고 나 자신과 약속했던 기억들이 희미하게 지워지지 않고 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 1992년의 화두는 한의사들을 모아서 네팔로 의료봉사 가는 것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경제적인 도움은 어렵고 몸과 마음으로 하는 의료봉사라면 가능했다. 우리는 개화기 때부터 일제36년, 625한국전쟁, 근현세를 거치면서 외국의 구호단체 국제기구로부터 숫한 원조와 도움을 받았다. 이것을 안면몰수 입을 싹 닦아버리면 안될 것 같았다. 그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네팔은 도움을 받을 필요충분조건과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1993~1996년 한약분쟁이란 국지전이 일어났던 시기이다. 이 무렵 전세(戰勢)는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었고 달걀로 바위치기식이었다. 그들은 정당한 대의명분도 없이 오직 힘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모든 한의사들이 대의명분보다 힘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순간이었다. 등 따시고 배부른 한의사, 너무 폭리를 취하는 비싼 한약 등을 운운하는 흑색선전과 심리전을 펼치면서 말도 안 되는 그들의 논리를 정당화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국민건강을 위해 한약도 약이니 약 전문가가 취급해야한다는 얼른 들으면 말 되는 소리와 대충 들으면 그럴싸한 말만 하고 있었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게다가 신문사의 주요 수입원이 제약회사의 약 광고인데 이 제약회사를 그들이 좌지우지하고 있었으니 언론의 편파보도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시대적인 요청과 소명은 노불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고귀한 자들의 사회적 책무)를 통한 자부심과 명예를 안겨줄 그런 단체 결성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그런 꿈을 꾸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그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행동이 절실했다. 그러나 그 꿈을 실현시켜나가는 과정은 어려움과 수도승 같은 고행을 요구했다. 이런 의료봉사를 갈 때 약간의 과대망상증(megalomania)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절박한 요구에도 다들 전투를 하느라 여념이 없어서 아무도 곁눈질이나 돌아보지 않아 혼자서 필마단기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본과4학년 각 대학 졸업준비위원회를 통해서 단원 모집을 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한의신문에서 기사가 나갔지만 묵묵부답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각 병원장 교수님들에게 애걸복걸 간청했지만 묵묵부답! 단 1명의 지원자도 없었다. 어떤 병원 과장은 사실 대단하지도 않은 한의사에게 대단한 한의사 위상을 내세우면 한참동안 나의 어설픔을 훈계했다. 나에게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 관형찰색을 하지 못해서 이해가 안 갔지만 아마도 그 자신의 비교우위적 위상에 대한 나르시시즘(narcissism;자아도취)이었던 것 같다. 아니면 한약분쟁시 상대로부터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고 분해서 정신이 없었던 탓이겠지 했다. 아군을 향해서 총질을 하고, 자기 편 골대를 향해 공을 날리는 자살골 차 넣는 멍청한 축구선수 같았다. 상황이 그토록 열악하고 척박했다.

 

사람들은 자신들 삶의 테두리에서 한 발짝도 나오려 하지 않았다. 여기저기 쑤셔본 곳마다 어처구니없는 반응이 나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방황했었다. 그 당시 한의사들 물이 좋았다지만 ‘세상만사, 세옹지마, 호사다마’라는 말이 현실이 되었다. 말도 안 되는 명분을 가지고 아전인수하는 그들에게 심하게 빼앗기고 당하지 않았던가?

나의 언어는 계속된다.“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나짐 히크멭Nazim Hikmet의 詩가 절망하는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일을 벌려놓고 혼자서 좌충우돌하면서도 교묘하게 충돌은 피해 다니고 있었다. 그래도 당시 국제 감각이 좀 있어서 외국 나가는 것을 그렇게 겁나지 않았고 미리 초청장도 받아두었다. 행정적인 절차를 해결해두고, 우리 원정을 대행해줄 업체도 미리 선정해 두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선수가 없었다.‘인덕이 없다’는 사실과 ‘사람을 설득할 줄 모른다’는 사실이 나의 양쪽 아킬레스건에 붙어서 힘들게 걸어가려하는 나를 뒤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안되는 것은 안 되는 것! 억지로 하려해도 안 되니 내려놓자. 放下着하자! 그냥 허탈하고 속이 상해서 함께 땀 흘렸던 산 벗들과 지인들과 후배들을 만났다. 그 당시 근무지가 인사동이라서 분위기잡고 술 마실 곳들이 이 골목 저 골목 너무 많았다. 한의사 초년이지만 주머니가 두둑해 여기저기 부르고 전화해서 饗應을 베풀었다. 잊고 싶었고 도망가고 싶었다.

 

숫한 고민과 번뇌와 갈등과 시행착오가 대인지뢰처럼 여기 저기 四方四位에서 불안하게 막고 있었지만 몸으로 때우고 요행으로 피하며 도꼬다이로 싸우면서 외인부대처럼 뚫고 지나갔다.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말대로 막막한 어둠 속에서도 길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낚시질하는 강태공처럼 입질하는 물고기를 낚으려고 집중을 했다. 낚‘시’를 접고 떠나려는 순간 입질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시’는 계속되었다. ‘혹시’ 했으나 ’역시’였다. 그래도 눈먼 물고기처럼 걸린 월척(越尺)들이 있었으니 그들과 함께 행복한 콤스타의 첫 역사를 쓰는 인연을 갖게 되었다.

 

그 동안 저돌적인 행동과 무모한 만용으로 좌충우돌했음에도 불구하고 1993년 2월 13일에 장장 18박 19일의 장기간 의료봉사를 가게 되었다. 공식 명칭 ‘한의사해외의료봉사단’(네팔 주재 한국대사관과 간질 구제 단체인 장미회에 공문을 보내면서 직인을 찍어 처음 씀)이 현실화되면서 비로소 내 주위를 아우성치며 정신없이 떠돌던 우연은 필연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연의 연속이 곧 필연이라는 말인가? 맞는 말이다. 모든 미래는 현재를 거쳐 과거를 향해 간다는 말과 같다. 과거에 놓인 현재, 현재에 놓인 미래이다. 이렇게 떠돌던 우연은 필연이 되어 18년이 흘렀다.

인도주의 실천, 나눔의 행복

인도주의 실천, 나눔의 행복


KOMSTA는 의료환경이 열악한 ODA 대상국 주민들을 위해 해외의료봉사단을 파견하고 있으며, 

파견국에서 학술교육 세미나, 임상교육 등을 통해 우리나라 고유의 한의학을 알리고 교육하는데 힘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