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활동을 하고나서...울산서여자중학교 조은우
먼저 이런 기회를 가지게 도와주시고 곁에 계셔주신 어머니, 이런 여행을 다녀올 수 있도록, 지탱해주신 아버지께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처음에 어머니께서 네팔의료봉사를 단체로 가는 곳이 있는데 어떠냐고 물어보셨을 때 큰 호감이 가지 않았습니다. 호감이라기 보단..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죠.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는 저에게 늘 단둘이 해외여행을 가고 싶다 라고 말씀하셨거든요. 하지만 어머니와 달리 저는 어머니와 같이 여행가는 것을 기대도 안했고 또 상상조차 하지 않았어요. 해외여행이라면 저야 감사하죠. 하지만 의료봉사에다가 가는 곳은 후진국인 네팔. 보나마나 밥은 맛없는 카레에 벌레들이 곳곳에서 습격해오고, 습기 때문에 줄줄 흘러내리는 땀과 눅눅한 호텔에 더러운 화장실이 우리를 반길 것 같았습니다. 처음에 당연히 저의 대답은 “음...어..한번 보고...?”였어요. 더군다나 진짜 한번 생각해 보겠다는 표정이 아니라 영혼 제로의 표정으로 말이예요. 하지만 어머니말이 자꾸 생각나면서 호기심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어머니께 여쭈어봤더니 우리가 가는 호텔은 최상급 호텔이어서 괜찮다고 고생은 4~5일만 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대답을 듣고 바로 승낙했습니다. 며칠간 상상을 너무 안 좋은 쪽으로 하던차에, 어머니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좋게만 느껴졌거든요.
드디어 출발 1일 전이예요. 10일치 짐을 싸느라 짐은 많은데, 기내용 케리어라 짐이 적어야해서 무척이나 고생했죠. 장도 엄청 보고요. 원래 당일 전날 밤이 가장 설레잖아요. 걱정만 되더라고요. 까다로운 입맛에 내가 거기서 밥은 잘 먹을 수 있을까, 아직 철없는 중학생이 거기서 잘 적응이나 할까. 설레었던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걱정만 가득 찼어요. 이런 생각에 땀 뻘뻘 흘리며 짐을 싸니 벌써 밤이 되었더라고요. 네팔 가기까지 하루도 안 남았다는 생각에 다시 기대감이 밀려왔어요. 걱정반 기대반으로 눈을 감으니 1초도 안된 것 같은데 어머니께서 깨우셨어요. 자꾸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며 옷을 갈아입고 짐체크를 하며 우리집을 한번 둘러봤습니다. 이제 10일은 못 볼 내집. 그렇게 아쉬운 집과의 작별인사를 하고 가족과 함께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일행을 만났지만 다들 낯설었어요. 어렸을 때 본 듯 조금 낯이 익으신 엄마 친구 분 도 계셨지만 막상 아빠와 은채와 헤어지니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게다가 그렇게 기대하던 저와 동갑 학생은 다른 사정으로 못 오고.... 동생들은 초등학생이고... 언니 오빠들은 다들 몇 번 와보신 상태시고 더군다나 제가 반말하고 그럴만한 나이들은 아니셨죠. 중학생은 딱 나뿐인 이 공간에서 다시 한번 집과 가족, 친구들의 그리움이 물밀 듯 밀려왔어요. 사실 고등학생,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낯설어 피하고 다닌 적도 있어요.
편하고 편한 비행기로 4~5시간 날라가니 네팔이라는 나라에 도착했습니다. 공항에 딱 들어서자마자 호텔과 게스트 하우스는 안봐도 될 것 같았어요. 공항인데 에어컨이 없다니.. 또 네팔식 짐검사 장면을 보니 네팔에서 비행기 테러는 우리나라 테러범들에겐 껌일 것 같았어요. 어머니의 말에 의심이 확 몰려오는 순간이었죠. 땀 흘리며 짐을 찾고 옮기고 나오니 버스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 버스를 타는 순간 물이 그냥 촤악.... 그렇게 호텔가는 동안에도 저희는 네팔의 가난함을 뼈져리게 느꼈습니다. 호텔에 들어오고 잠깐의 회의 또는 호텔소개를 듣고 방에 들어갔어요. 진짜 절망적이였습니다. 꾀죄죄한 냄새, 온몸을 수분 축축으로 만들어줄 눅눅한 침대에 방충망도 없고 창문도 없이 커튼만 쳐져있으며, 더군다나 비까지... 정말 비행기표만 구해준다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정말 싫고 싫은 저녁밥과 물이 세는 버스, 눅눅한 호텔... 마음에 드는게 없었죠. 그날 밤에는 각자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아직 이름은 다 외우지 못했지만 기필코 다 외우리라 결심했죠. 그때 말 걸어주시고 인사해주신 언니 오빠들이 한층더 친근히 느껴졌어요.
피곤한 밤을 보내고 일어나서 짐을 싸고 버스를 탔습니다. 달리고 달려서 카트만두에서 다딩까지 왔어요. 트럭같은 큰 버스로 갈아타니 이때까지는 포장도로였고 이제부터는 비포장도로라고 하시네요. 이때까지 포장도로였다는것에 1차 충격을 받은 저는 30km가 3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듣고 정신의 이상을 느꼈어요. 30km가 ....3시간이라니요.....정말 이해가 안됐습니다. 막상 비포장 도로에 들어서니 시간문제를 떠나서 여기서 살아 돌아가면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로 밑은 절벽에 폭은 정말 좁고 구불구불, 태반이 급 커브 구간에다 울퉁불퉁, 산사태라도 일어난건지 버스가 흔들리고 날고 뜨고 말도 아니었죠. 한번은 진흙탕에 빠져서 현지분들께서 버스를 밀어주신 적도 있어요. 책에서만 보던 이야기가 바로 눈앞에 일어나고 있었죠. 저희는 식겁한채 운전사 뒷통수만 믿고 타고 갔어요 완전 운전사분은 베테랑급이셨죠. 잤다가 깼다가 밀었다가 부딪쳤다가 내렸다가 올랐다가 날았다가를 반복해서 드디어 봉사할 장소에 도착했어요.
봉사할 장소는 학교였어요. 교복을 이쁘게 차려 입은 제 또래 아이들이 저희를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었죠. 하지만 저희는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눌 겨를이 없었어요. 그날은 의료봉사를 알리는 행사시간을 가지느라 엄청 바빴기 때문이에요. 전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네팔어가 마냥 자장가처럼 들렸어요. 좀 있으니 하얀 천을 목에 감아 주더라구요. 그걸 걸치고 계속 영혼없이 네팔어를 들으며 앞을 쳐다보고 있으니 연설이 끝났어요. 너무 좋았는데 이제는 다른 분이 연설을 하시네요. 계속 들으니 드디어 끝났어요. 내일부터 같이 일할 팀들 끼리 이야기도 하고 네팔어를 준비하기도 했어요. 저희 통역사는 여자애였는데 저보다 한 살위인 언니였어요. 이름은 ‘따라’였고요. 정말 여리고 이쁜 언니 였어요. 착하기도 했죠. 그렇게 인사를 끝내니, 약간의 진료시간을 가졌어요. 그런김에 어머니랑 화장실에 다녀왔죠. 처음 본 화장실 외부를 보니 어머니께서 지금 저에게 장난 치시는건가 했어요. 화장실이 텐트라니요... 슬쩍 내부를 보니 더 충격이였어요. 널빤지 두 개에다 그사이에 구멍을 파고....끝.. 어쩔 수 없이 들어갔다 나왔어요. 고난이었죠.
그렇게 봉사하는 장소에서의 일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왔어요. 방 배정을 받으니..저희 방에 화장실이 없네요. 공동 화장실이 있다는 말을 듣고 가니... 울고 싶었어요. 생전 처음 보는 화장실이었어요. 그래도 씻어야 해서 어렵게 샤워와 양치질을 마치고 돌아왔어요. 어머니의 말씀과는 너무 다른 호텔, 숙소의 내부에 정말 실망했죠. 그래도 마음 굳게 먹고, 하룻밤을 거기서 머물렀어요.
봉사장소에 온지 2일째가 됐어요. 아침밥을 먹고 부쳐온 짐을 나르고 정리하느라 엄청 바빴어요. 크게 도움이 되지는 못했지만 저도 도왔어요. 저희 어머니를 포함해서 가운을 차려 입으신 원장님들이 마냥 대단하고 존경스럽게 느껴졌어요. 오로지 봉사하겠다는 마음만 믿고 여기까지 오신 원장님들과 언니오빠들 동생들이 정말 자랑스러웠죠. 역할 분담 결과, 전 약재실을 맡았어요. 원래는 꼬마들과 놀아주는 분담이라고 들었었는데, 약재실을 맡게되어 다행이라 생각했고, 맡은 일 열심히 해보겠다고 다짐했어요.
정말 진료가 시작되었어요. 환자가 한분한분 늘어나더니 어느새 정말 쉬지도 못 할 정도로 바빠졌어요. 소민이 언니와 소민이 언니의 어머니, 동기 오빠 어머니, 통역을 맡은 현지인 2명 이렇게 6명이서 할려니 너무 힘들어서 통역 하시는 분을 몇분 더 데려왔어요. 차트를 받고 약을 주고 열심히 설명을 하고 다음 손님 차트를 받을려니 또 물어보고 다시 열심히 설명해주니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으며 쌩 가버리고하니 너무 힘들었죠. 옆팀분들과 언니가 많이 도와주어서 조금 쉴 수 도 있었어요. ‘하루에 식사 후 3번 드세요’가 네팔어인 ‘카나버치 띤꼬띤 뻐떡하니’를 하루에 200번 이상을 외친 것 같았어요. 저녁쯤에는 몸이 말이 아니었죠. 발꿈치는 엄청 아프고 목에서는 갈라지는 소리가 나오고 다리와 팔은 정말 간지럽고 정신이 멀쩡한게 다행일 만큼 힘들고 지친 첫날이었어요.
저녁을 먹고 게스트 하우스에 오니 어머니께서 방을 바뀌었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처음 배정된 방에 비하면 이 방은 로얄 페밀리 VVIP급 방이였어요. 화장실이 딸려있고 침대가 하나 더 있고 창문이 있다는 것에 감격했죠. 어제 못감은 머리를 드디어 감으며 말리려고 나오니 저기 멀리서 경진이 언니께서 제 이름을 부르셨어요. 내려가니 언니 오빠들이 다 계셨죠. 중학생을 끼우기엔 조금 불편함이 따라올텐데 이렇게 저를 찾아주셔서 진짜 감사했어요. 거기에 가니 모두들 다 반겨주셨어요. 제민이 오빠와 경진이 언니 사이에 끼어 술대신 음료를 홀짝이며 즐겼어요.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답니다.
세 번째 아침이 또 다가왔어요. 너무 정신없는 오전이었어요. 게스트 하우스에서 아침일찍 일어나 우리 팀에게 아침 인사를 건내드리고 나니 버스를 탈 시간이 되었지요. 덜컹덜컹 흔들리는 버스를 타면서 슬쩍 아래를 보니 절벽이었어요. 너무 무서워서 버스가 기울어질때마다 꺄악 하고 비명을 질렀는데 그때 제 겁을 덜어주신 연진이 언니와 창문을 보지 말라고 조언을 내주신 현지인 분도 계셨죠. 너무 고마우셨구요.
아침을 먹고 약을 나누어주고 약 정리를 하고 차트 정리를 하니 현지인들이 만들어 주신 간식이 왔어요. 밀크티와 감자튀김이였는데, 너무 맛있었답니다. 점심을 먹고 오후 진료까지 힘들게 하고 나서야 저녁 시간이 되었어요. 쉴 생각에 들뜨는 마음을 억누르며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했죠. 씻고 나서, 영국에서 온 언니들과, 팀 분들, 언니 오빠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즐겼어요.
다음날은 밤새 내린 비로 산사태가 일어나 버스를 조금 타고 가다가 내려야 하는 일이 있었어요. 그냥 편히 버스타고 올라가고 내려갈때는 ‘진짜 차라리 내 다리 믿고 가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어두컴컴한 밤에 후레쉬를 켜고 가려니 무섭기도 하고 힘들기도 했어요. 그때 강원장님께서 제 손을 잡으시고는 등산할때에 요령을 가르치시며 인도하신적도 있어요. 덕분에 후레쉬의 도움없이 안전하고 편하게 내려올 수 있었죠. 그날 밤에는 문신인 ‘헤나’를 하며 언니들과 오빠들이랑 추억을 쌓기도 했답니다. 이쁘고 진한 헤나를 보니 제 마음도 덩달아 편해졌어요. 또 한편으로는 얼마 남지 않은 봉사활동 일정이 새삼 아쉽게 느껴졌죠.
드디어 봉사 마지막 날이에요! 힘찬 마음으로 찬물에 샤워를 하고 준비를 하고 나왔는데, 걸어가야 한다고 하시더라구요. 차타고 1시간쯤의 거리를 저의 두 다리로 가야한다니요. 갑자기 날아다니던 버스가 그리워졌어요. 그렇게 땀 뻘뻘 흘리며 올라가서, 겨우 어제 버스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던 지점에 도착했어요. 중간에는 가은이와 정민이랑 물을 나누어 마시며 같이 올라가기도 했었죠. 비옷을 입고 나갔다가 너무 더워서 비옷은 벗고 우산을 썼는데, 그래도 힘들어서 ‘에라, 모르겠다 이왕 젖은거’ 라고 생각하며 맨몸으로 웅덩이에 발을 담그며 걸었어요. 한번은 너무 힘들어서 경진이 언니와 현지인이 태워주신 오토바이에 무섭다고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며 올라가기도 했답니다.
그렇게 진료 하기 전부터도 진 다 빼고 도착하니 맛있는 아침이 저희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맛있게 먹고 나니 진료 시간이네요! 어쩌면 다시는 못할 이 해외에서의 진료를 만끽하며 어느 때보다도 더 열심히 하고 밝게 일을 시작했어요. 그때 특별한 맛있는 치킨을 제공해주신 이춘재 단장님과, 그 맛있는 치킨을 만들어주신 많은 현지인 분들게 정말 감사했어요. 저녁땐 온통 고기로 차려진 만찬을 먹으며 네팔의 아리랑인 ‘레썸 삐리리’를 듣고 춤추며 마지막의 시간을 즐겼어요. 그렇게 거기서의 배경과 많은 도와주신 현지분들, 풍선과 사탕을 가지고 싶어 조르던 아이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차에 탔답니다.
봉사활동 장소에서 카트만두 다음으로 큰 도시인 포카라까지는 꽤 걸렸어요. 버스를 타고 부딪치며 포카라에 있는 상그리라 호텔에 도착했어요. 호텔에 방을 배정받고 불안한 마음으로 방을 보니 완전 천국이었어요. 한국 호텔과 비교를 하면 턱 없이 부족한 방이었지만, 게스트 하우스 보다는 너무나도 좋고 좋은 방이었어요.
짐을 간단히 꺼내고, 거리로 쇼핑을 하러 밖으로 나갔답니다. 마사지팀과, 쇼핑팀을 나누어서 거리를 돌아다녔어요. 생각했던것보다 더 이쁘고 아기자기한 물건들이 많았답니다. 달력도 사고, 히말라야 립밤과 수분크림, 팔찌, 드림케쳐, 폰고리까지 살 수 있었습니다. 다시 팀원들을 만나고 한식을 차리는 ‘한국사랑’이라는 식당에 갔습니다. 더군다나 한글로 되어있어서 놀랐어요. 거기에서 비빔밥을 한 그릇 먹고 다시 상그리라 호텔로 갔습니다. 다들 너무 피곤한 상태였기에 바로 숙소로 돌아가 잤어요. 호텔에서 더 이상 눅눅하지 않은 이불과 베개를 껴안으며 네팔에서의 얼마 남지 않은 밤을 보냈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식당을 힘들게 찾아서 가니 카트만두의 상그리라 호텔과 비슷하지만 더욱 더 다양한 뷔페 음식들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서 우리 일행분들도 몇몇 만났고요. 동기오빠와 제민이오빠, 성진이오빠, 또 정훈이랑 민혁이는 바로 앞에 수영장에서 놀고 있었어요.
그렇게 재밌는 광경을 보면서 아침식사가 끝났답니다. 저희가 관광을 하러 간곳은 안나푸르나가 어렴풋이 보이는 어떤 사원이었어요. 봉사 활동하는 도중에서도 기적처럼 마나술루 봉우리가 살짝 보이기도 했었지요. 지금 안나푸르나를 혹여나 더 가까이 볼 수 있을것만같은 기대에 힘든 것도 잊고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올라가고 또 올라가서 도착한 곳은 어떤 사원이 있는 곳이었어요. 신발을 벗고, 시계 방향으로 3번을 돌면 행운이 찾아 온다는 곳이였죠. 아쉽게도 전 미쳐 알지 못하고 시계 반대방향으로 한바퀴 돌았지만, 그래도 보기도 쉽지 않은 네팔 사원을 직접 올라가보아서 뿌듯했어요. 거기서 가족사진도 한 방 찍고요. 내려오니 기념품을 파는 조그마한 매장이 여럿 있더라구요. 거기서 가장 눈에 끌리는 뱀 모형 하나를 사고 나니 뭔가 더 뿌듯한 마음이 들었어요.
또 정확한 날짜기억이 나지 않지만, 저희는 화장터에 갔던 적이 있었어요. 화장을 할 수 있는 자리터가 마련이 되어 있고, 앞에는 시체의 재를 뿌리는 강이 있었어요. 그냥 죽어서 불길에 태워져, 재가 되어 강에 뿌려지는게.... 조금 허탈하고 슬펐어요. 그 강에서 목욕하며 돈을 줍는 사람들을 몇 봤는데, 뭔가 마음 한 구석이 아련해졌습니다. 이후엔 원숭이 사원에 갔었어요. 입구부터 원숭이들이 몰려오는데 정말 귀여웠죠. 먹이를 주니 쪼르르 달려와서 다 먹고 쌩 가버리는 뒷 모습이 너무 귀여웠어요. 계단 위로 올라가서 경치를 구경하는데, 어떤 사람이 원숭이 먹이를 확 뿌리고 가더니 그때부터 원숭이끼리의 전쟁이 시작됐어요. 하지만 그 난리통에도 자기 새끼는 확실히 챙겨 안고 다니는 어미 원숭이의 모성애를 보고 조금 놀라웠어요. 다음엔 폭포를 보러 갔답니다. 정확한 이름과 장소, 시간은 기억이 안 나지만, 폭포가 흘러내리는 장면만큼은 기억 속에 콕 박혀있는 것 같아요. 엄청나게 깊은 폭포 길과 시원하게도 큰 소리를 내며 내려오는 폭포 또, 까마득해서 안 보이는 구멍까지. 너무 시원하고 잊을 수 없는 광경인 것 같아요. 끝나고 나니 동전을 던져 안쪽에 정확하게 넣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분수대를 봤어요. 심원장님께서 주워주신 네팔 동전 하나를 꺼내 조심히 던지니 놀랍게도 안에 들어갔어요. 얼른 장난 반, 의심 반으로 소원을 빌고 버스를 탔답니다.
이렇게 잊을 수 없는 너무나도 소중한 추억이 하나하나 쌓이고, 저희가 한국으로 다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것이 당일이 되었습니다. 처음 왔을때는 그렇게 돌아가고 싶고 그리웠던 한국이 이제는 ‘하루라도 더 우리 콤스타 팀원들과 같이 있을 수 있다면 좋을텐데,,,’라는 생각이 들때쯤에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게 너무 슬프고 아쉬웠어요. 비록 호텔 시설과 많은 곤충들의 물림 때문에 짜증이 나고 힘들었지만, 힘들 때 위로받았던 팀분들과 같이 있으며 느꼈던 기쁨과 행복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정말 지루하고, 매일 반복되는 저의 일상에서 또, 계속 학원과 집만 달려야 하는 이 지겹고 더운 여름방학이 올해 네팔의료봉사로 정말 즐겁고 행복했던 10일이 된 것 같아요.
진료를 할 때 도와주셨던 많은 팀분들, 또한 많은 언니 오빠들, 현지분들 정말 잊지 못할 것 같아요. 그리고 같이 놀 때 저를 배려해주셨던 언니 오빠들 너무 감사드려요. 세월이 흘러, 만약 제가 아이들을 낳고 기른다면 이런 해외봉사는 한 번 쯤은 가게 해주고 싶어요. 설사, 저처럼 불평불만하고 영혼 없이 가려고 한다고 해도, 어느새 이 기회는 일생의 기억에서 가장 콕 박히는, 사회생활에 나가서 어렸을 적의 해외봉사를 생각하며 피식 웃을 수 있는 가장 소중하고 값진 것이 될것 같아요. 지겹도록 봤던 모기들과 정체모를 벌레들, 울퉁불퉁해서 많은 고통을 안겨주었던 비포장도로, 게스트 하우스에서 식겁을 했던 도마뱀들이, 그땐 정말 보고 싶지 않았는데 다시 일상으로 가니까 사소한 것 하나마저도 너무 그립고 아쉬워요.
정말 제가 해단식때 했던 그 말처럼, 시간만 되고 갈 수 있는 형편만 된다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다시 오고 싶어요. 정말 저에겐 절대로 평범할 수 없는 가장 특별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봉사활동 여행이 되었어요!!! 콤스타 콤스타 파이팅!!!!!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다릴게요!!!!!
봉사활동을 하고나서...울산서여자중학교 조은우
먼저 이런 기회를 가지게 도와주시고 곁에 계셔주신 어머니, 이런 여행을 다녀올 수 있도록, 지탱해주신 아버지께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처음에 어머니께서 네팔의료봉사를 단체로 가는 곳이 있는데 어떠냐고 물어보셨을 때 큰 호감이 가지 않았습니다. 호감이라기 보단..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죠.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는 저에게 늘 단둘이 해외여행을 가고 싶다 라고 말씀하셨거든요. 하지만 어머니와 달리 저는 어머니와 같이 여행가는 것을 기대도 안했고 또 상상조차 하지 않았어요. 해외여행이라면 저야 감사하죠. 하지만 의료봉사에다가 가는 곳은 후진국인 네팔. 보나마나 밥은 맛없는 카레에 벌레들이 곳곳에서 습격해오고, 습기 때문에 줄줄 흘러내리는 땀과 눅눅한 호텔에 더러운 화장실이 우리를 반길 것 같았습니다. 처음에 당연히 저의 대답은 “음...어..한번 보고...?”였어요. 더군다나 진짜 한번 생각해 보겠다는 표정이 아니라 영혼 제로의 표정으로 말이예요. 하지만 어머니말이 자꾸 생각나면서 호기심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어머니께 여쭈어봤더니 우리가 가는 호텔은 최상급 호텔이어서 괜찮다고 고생은 4~5일만 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대답을 듣고 바로 승낙했습니다. 며칠간 상상을 너무 안 좋은 쪽으로 하던차에, 어머니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좋게만 느껴졌거든요.
드디어 출발 1일 전이예요. 10일치 짐을 싸느라 짐은 많은데, 기내용 케리어라 짐이 적어야해서 무척이나 고생했죠. 장도 엄청 보고요. 원래 당일 전날 밤이 가장 설레잖아요. 걱정만 되더라고요. 까다로운 입맛에 내가 거기서 밥은 잘 먹을 수 있을까, 아직 철없는 중학생이 거기서 잘 적응이나 할까. 설레었던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걱정만 가득 찼어요. 이런 생각에 땀 뻘뻘 흘리며 짐을 싸니 벌써 밤이 되었더라고요. 네팔 가기까지 하루도 안 남았다는 생각에 다시 기대감이 밀려왔어요. 걱정반 기대반으로 눈을 감으니 1초도 안된 것 같은데 어머니께서 깨우셨어요. 자꾸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며 옷을 갈아입고 짐체크를 하며 우리집을 한번 둘러봤습니다. 이제 10일은 못 볼 내집. 그렇게 아쉬운 집과의 작별인사를 하고 가족과 함께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일행을 만났지만 다들 낯설었어요. 어렸을 때 본 듯 조금 낯이 익으신 엄마 친구 분 도 계셨지만 막상 아빠와 은채와 헤어지니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게다가 그렇게 기대하던 저와 동갑 학생은 다른 사정으로 못 오고.... 동생들은 초등학생이고... 언니 오빠들은 다들 몇 번 와보신 상태시고 더군다나 제가 반말하고 그럴만한 나이들은 아니셨죠. 중학생은 딱 나뿐인 이 공간에서 다시 한번 집과 가족, 친구들의 그리움이 물밀 듯 밀려왔어요. 사실 고등학생,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낯설어 피하고 다닌 적도 있어요.
편하고 편한 비행기로 4~5시간 날라가니 네팔이라는 나라에 도착했습니다. 공항에 딱 들어서자마자 호텔과 게스트 하우스는 안봐도 될 것 같았어요. 공항인데 에어컨이 없다니.. 또 네팔식 짐검사 장면을 보니 네팔에서 비행기 테러는 우리나라 테러범들에겐 껌일 것 같았어요. 어머니의 말에 의심이 확 몰려오는 순간이었죠. 땀 흘리며 짐을 찾고 옮기고 나오니 버스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 버스를 타는 순간 물이 그냥 촤악.... 그렇게 호텔가는 동안에도 저희는 네팔의 가난함을 뼈져리게 느꼈습니다. 호텔에 들어오고 잠깐의 회의 또는 호텔소개를 듣고 방에 들어갔어요. 진짜 절망적이였습니다. 꾀죄죄한 냄새, 온몸을 수분 축축으로 만들어줄 눅눅한 침대에 방충망도 없고 창문도 없이 커튼만 쳐져있으며, 더군다나 비까지... 정말 비행기표만 구해준다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정말 싫고 싫은 저녁밥과 물이 세는 버스, 눅눅한 호텔... 마음에 드는게 없었죠. 그날 밤에는 각자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아직 이름은 다 외우지 못했지만 기필코 다 외우리라 결심했죠. 그때 말 걸어주시고 인사해주신 언니 오빠들이 한층더 친근히 느껴졌어요.
피곤한 밤을 보내고 일어나서 짐을 싸고 버스를 탔습니다. 달리고 달려서 카트만두에서 다딩까지 왔어요. 트럭같은 큰 버스로 갈아타니 이때까지는 포장도로였고 이제부터는 비포장도로라고 하시네요. 이때까지 포장도로였다는것에 1차 충격을 받은 저는 30km가 3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듣고 정신의 이상을 느꼈어요. 30km가 ....3시간이라니요.....정말 이해가 안됐습니다. 막상 비포장 도로에 들어서니 시간문제를 떠나서 여기서 살아 돌아가면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로 밑은 절벽에 폭은 정말 좁고 구불구불, 태반이 급 커브 구간에다 울퉁불퉁, 산사태라도 일어난건지 버스가 흔들리고 날고 뜨고 말도 아니었죠. 한번은 진흙탕에 빠져서 현지분들께서 버스를 밀어주신 적도 있어요. 책에서만 보던 이야기가 바로 눈앞에 일어나고 있었죠. 저희는 식겁한채 운전사 뒷통수만 믿고 타고 갔어요 완전 운전사분은 베테랑급이셨죠. 잤다가 깼다가 밀었다가 부딪쳤다가 내렸다가 올랐다가 날았다가를 반복해서 드디어 봉사할 장소에 도착했어요.
봉사할 장소는 학교였어요. 교복을 이쁘게 차려 입은 제 또래 아이들이 저희를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었죠. 하지만 저희는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눌 겨를이 없었어요. 그날은 의료봉사를 알리는 행사시간을 가지느라 엄청 바빴기 때문이에요. 전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네팔어가 마냥 자장가처럼 들렸어요. 좀 있으니 하얀 천을 목에 감아 주더라구요. 그걸 걸치고 계속 영혼없이 네팔어를 들으며 앞을 쳐다보고 있으니 연설이 끝났어요. 너무 좋았는데 이제는 다른 분이 연설을 하시네요. 계속 들으니 드디어 끝났어요. 내일부터 같이 일할 팀들 끼리 이야기도 하고 네팔어를 준비하기도 했어요. 저희 통역사는 여자애였는데 저보다 한 살위인 언니였어요. 이름은 ‘따라’였고요. 정말 여리고 이쁜 언니 였어요. 착하기도 했죠. 그렇게 인사를 끝내니, 약간의 진료시간을 가졌어요. 그런김에 어머니랑 화장실에 다녀왔죠. 처음 본 화장실 외부를 보니 어머니께서 지금 저에게 장난 치시는건가 했어요. 화장실이 텐트라니요... 슬쩍 내부를 보니 더 충격이였어요. 널빤지 두 개에다 그사이에 구멍을 파고....끝.. 어쩔 수 없이 들어갔다 나왔어요. 고난이었죠.
그렇게 봉사하는 장소에서의 일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왔어요. 방 배정을 받으니..저희 방에 화장실이 없네요. 공동 화장실이 있다는 말을 듣고 가니... 울고 싶었어요. 생전 처음 보는 화장실이었어요. 그래도 씻어야 해서 어렵게 샤워와 양치질을 마치고 돌아왔어요. 어머니의 말씀과는 너무 다른 호텔, 숙소의 내부에 정말 실망했죠. 그래도 마음 굳게 먹고, 하룻밤을 거기서 머물렀어요.
봉사장소에 온지 2일째가 됐어요. 아침밥을 먹고 부쳐온 짐을 나르고 정리하느라 엄청 바빴어요. 크게 도움이 되지는 못했지만 저도 도왔어요. 저희 어머니를 포함해서 가운을 차려 입으신 원장님들이 마냥 대단하고 존경스럽게 느껴졌어요. 오로지 봉사하겠다는 마음만 믿고 여기까지 오신 원장님들과 언니오빠들 동생들이 정말 자랑스러웠죠. 역할 분담 결과, 전 약재실을 맡았어요. 원래는 꼬마들과 놀아주는 분담이라고 들었었는데, 약재실을 맡게되어 다행이라 생각했고, 맡은 일 열심히 해보겠다고 다짐했어요.
정말 진료가 시작되었어요. 환자가 한분한분 늘어나더니 어느새 정말 쉬지도 못 할 정도로 바빠졌어요. 소민이 언니와 소민이 언니의 어머니, 동기 오빠 어머니, 통역을 맡은 현지인 2명 이렇게 6명이서 할려니 너무 힘들어서 통역 하시는 분을 몇분 더 데려왔어요. 차트를 받고 약을 주고 열심히 설명을 하고 다음 손님 차트를 받을려니 또 물어보고 다시 열심히 설명해주니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으며 쌩 가버리고하니 너무 힘들었죠. 옆팀분들과 언니가 많이 도와주어서 조금 쉴 수 도 있었어요. ‘하루에 식사 후 3번 드세요’가 네팔어인 ‘카나버치 띤꼬띤 뻐떡하니’를 하루에 200번 이상을 외친 것 같았어요. 저녁쯤에는 몸이 말이 아니었죠. 발꿈치는 엄청 아프고 목에서는 갈라지는 소리가 나오고 다리와 팔은 정말 간지럽고 정신이 멀쩡한게 다행일 만큼 힘들고 지친 첫날이었어요.
저녁을 먹고 게스트 하우스에 오니 어머니께서 방을 바뀌었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처음 배정된 방에 비하면 이 방은 로얄 페밀리 VVIP급 방이였어요. 화장실이 딸려있고 침대가 하나 더 있고 창문이 있다는 것에 감격했죠. 어제 못감은 머리를 드디어 감으며 말리려고 나오니 저기 멀리서 경진이 언니께서 제 이름을 부르셨어요. 내려가니 언니 오빠들이 다 계셨죠. 중학생을 끼우기엔 조금 불편함이 따라올텐데 이렇게 저를 찾아주셔서 진짜 감사했어요. 거기에 가니 모두들 다 반겨주셨어요. 제민이 오빠와 경진이 언니 사이에 끼어 술대신 음료를 홀짝이며 즐겼어요.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답니다.
세 번째 아침이 또 다가왔어요. 너무 정신없는 오전이었어요. 게스트 하우스에서 아침일찍 일어나 우리 팀에게 아침 인사를 건내드리고 나니 버스를 탈 시간이 되었지요. 덜컹덜컹 흔들리는 버스를 타면서 슬쩍 아래를 보니 절벽이었어요. 너무 무서워서 버스가 기울어질때마다 꺄악 하고 비명을 질렀는데 그때 제 겁을 덜어주신 연진이 언니와 창문을 보지 말라고 조언을 내주신 현지인 분도 계셨죠. 너무 고마우셨구요.
아침을 먹고 약을 나누어주고 약 정리를 하고 차트 정리를 하니 현지인들이 만들어 주신 간식이 왔어요. 밀크티와 감자튀김이였는데, 너무 맛있었답니다. 점심을 먹고 오후 진료까지 힘들게 하고 나서야 저녁 시간이 되었어요. 쉴 생각에 들뜨는 마음을 억누르며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했죠. 씻고 나서, 영국에서 온 언니들과, 팀 분들, 언니 오빠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즐겼어요.
다음날은 밤새 내린 비로 산사태가 일어나 버스를 조금 타고 가다가 내려야 하는 일이 있었어요. 그냥 편히 버스타고 올라가고 내려갈때는 ‘진짜 차라리 내 다리 믿고 가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어두컴컴한 밤에 후레쉬를 켜고 가려니 무섭기도 하고 힘들기도 했어요. 그때 강원장님께서 제 손을 잡으시고는 등산할때에 요령을 가르치시며 인도하신적도 있어요. 덕분에 후레쉬의 도움없이 안전하고 편하게 내려올 수 있었죠. 그날 밤에는 문신인 ‘헤나’를 하며 언니들과 오빠들이랑 추억을 쌓기도 했답니다. 이쁘고 진한 헤나를 보니 제 마음도 덩달아 편해졌어요. 또 한편으로는 얼마 남지 않은 봉사활동 일정이 새삼 아쉽게 느껴졌죠.
드디어 봉사 마지막 날이에요! 힘찬 마음으로 찬물에 샤워를 하고 준비를 하고 나왔는데, 걸어가야 한다고 하시더라구요. 차타고 1시간쯤의 거리를 저의 두 다리로 가야한다니요. 갑자기 날아다니던 버스가 그리워졌어요. 그렇게 땀 뻘뻘 흘리며 올라가서, 겨우 어제 버스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던 지점에 도착했어요. 중간에는 가은이와 정민이랑 물을 나누어 마시며 같이 올라가기도 했었죠. 비옷을 입고 나갔다가 너무 더워서 비옷은 벗고 우산을 썼는데, 그래도 힘들어서 ‘에라, 모르겠다 이왕 젖은거’ 라고 생각하며 맨몸으로 웅덩이에 발을 담그며 걸었어요. 한번은 너무 힘들어서 경진이 언니와 현지인이 태워주신 오토바이에 무섭다고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며 올라가기도 했답니다.
그렇게 진료 하기 전부터도 진 다 빼고 도착하니 맛있는 아침이 저희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맛있게 먹고 나니 진료 시간이네요! 어쩌면 다시는 못할 이 해외에서의 진료를 만끽하며 어느 때보다도 더 열심히 하고 밝게 일을 시작했어요. 그때 특별한 맛있는 치킨을 제공해주신 이춘재 단장님과, 그 맛있는 치킨을 만들어주신 많은 현지인 분들게 정말 감사했어요. 저녁땐 온통 고기로 차려진 만찬을 먹으며 네팔의 아리랑인 ‘레썸 삐리리’를 듣고 춤추며 마지막의 시간을 즐겼어요. 그렇게 거기서의 배경과 많은 도와주신 현지분들, 풍선과 사탕을 가지고 싶어 조르던 아이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차에 탔답니다.
봉사활동 장소에서 카트만두 다음으로 큰 도시인 포카라까지는 꽤 걸렸어요. 버스를 타고 부딪치며 포카라에 있는 상그리라 호텔에 도착했어요. 호텔에 방을 배정받고 불안한 마음으로 방을 보니 완전 천국이었어요. 한국 호텔과 비교를 하면 턱 없이 부족한 방이었지만, 게스트 하우스 보다는 너무나도 좋고 좋은 방이었어요.
짐을 간단히 꺼내고, 거리로 쇼핑을 하러 밖으로 나갔답니다. 마사지팀과, 쇼핑팀을 나누어서 거리를 돌아다녔어요. 생각했던것보다 더 이쁘고 아기자기한 물건들이 많았답니다. 달력도 사고, 히말라야 립밤과 수분크림, 팔찌, 드림케쳐, 폰고리까지 살 수 있었습니다. 다시 팀원들을 만나고 한식을 차리는 ‘한국사랑’이라는 식당에 갔습니다. 더군다나 한글로 되어있어서 놀랐어요. 거기에서 비빔밥을 한 그릇 먹고 다시 상그리라 호텔로 갔습니다. 다들 너무 피곤한 상태였기에 바로 숙소로 돌아가 잤어요. 호텔에서 더 이상 눅눅하지 않은 이불과 베개를 껴안으며 네팔에서의 얼마 남지 않은 밤을 보냈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식당을 힘들게 찾아서 가니 카트만두의 상그리라 호텔과 비슷하지만 더욱 더 다양한 뷔페 음식들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서 우리 일행분들도 몇몇 만났고요. 동기오빠와 제민이오빠, 성진이오빠, 또 정훈이랑 민혁이는 바로 앞에 수영장에서 놀고 있었어요.
그렇게 재밌는 광경을 보면서 아침식사가 끝났답니다. 저희가 관광을 하러 간곳은 안나푸르나가 어렴풋이 보이는 어떤 사원이었어요. 봉사 활동하는 도중에서도 기적처럼 마나술루 봉우리가 살짝 보이기도 했었지요. 지금 안나푸르나를 혹여나 더 가까이 볼 수 있을것만같은 기대에 힘든 것도 잊고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올라가고 또 올라가서 도착한 곳은 어떤 사원이 있는 곳이었어요. 신발을 벗고, 시계 방향으로 3번을 돌면 행운이 찾아 온다는 곳이였죠. 아쉽게도 전 미쳐 알지 못하고 시계 반대방향으로 한바퀴 돌았지만, 그래도 보기도 쉽지 않은 네팔 사원을 직접 올라가보아서 뿌듯했어요. 거기서 가족사진도 한 방 찍고요. 내려오니 기념품을 파는 조그마한 매장이 여럿 있더라구요. 거기서 가장 눈에 끌리는 뱀 모형 하나를 사고 나니 뭔가 더 뿌듯한 마음이 들었어요.
또 정확한 날짜기억이 나지 않지만, 저희는 화장터에 갔던 적이 있었어요. 화장을 할 수 있는 자리터가 마련이 되어 있고, 앞에는 시체의 재를 뿌리는 강이 있었어요. 그냥 죽어서 불길에 태워져, 재가 되어 강에 뿌려지는게.... 조금 허탈하고 슬펐어요. 그 강에서 목욕하며 돈을 줍는 사람들을 몇 봤는데, 뭔가 마음 한 구석이 아련해졌습니다. 이후엔 원숭이 사원에 갔었어요. 입구부터 원숭이들이 몰려오는데 정말 귀여웠죠. 먹이를 주니 쪼르르 달려와서 다 먹고 쌩 가버리는 뒷 모습이 너무 귀여웠어요. 계단 위로 올라가서 경치를 구경하는데, 어떤 사람이 원숭이 먹이를 확 뿌리고 가더니 그때부터 원숭이끼리의 전쟁이 시작됐어요. 하지만 그 난리통에도 자기 새끼는 확실히 챙겨 안고 다니는 어미 원숭이의 모성애를 보고 조금 놀라웠어요. 다음엔 폭포를 보러 갔답니다. 정확한 이름과 장소, 시간은 기억이 안 나지만, 폭포가 흘러내리는 장면만큼은 기억 속에 콕 박혀있는 것 같아요. 엄청나게 깊은 폭포 길과 시원하게도 큰 소리를 내며 내려오는 폭포 또, 까마득해서 안 보이는 구멍까지. 너무 시원하고 잊을 수 없는 광경인 것 같아요. 끝나고 나니 동전을 던져 안쪽에 정확하게 넣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분수대를 봤어요. 심원장님께서 주워주신 네팔 동전 하나를 꺼내 조심히 던지니 놀랍게도 안에 들어갔어요. 얼른 장난 반, 의심 반으로 소원을 빌고 버스를 탔답니다.
이렇게 잊을 수 없는 너무나도 소중한 추억이 하나하나 쌓이고, 저희가 한국으로 다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것이 당일이 되었습니다. 처음 왔을때는 그렇게 돌아가고 싶고 그리웠던 한국이 이제는 ‘하루라도 더 우리 콤스타 팀원들과 같이 있을 수 있다면 좋을텐데,,,’라는 생각이 들때쯤에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게 너무 슬프고 아쉬웠어요. 비록 호텔 시설과 많은 곤충들의 물림 때문에 짜증이 나고 힘들었지만, 힘들 때 위로받았던 팀분들과 같이 있으며 느꼈던 기쁨과 행복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정말 지루하고, 매일 반복되는 저의 일상에서 또, 계속 학원과 집만 달려야 하는 이 지겹고 더운 여름방학이 올해 네팔의료봉사로 정말 즐겁고 행복했던 10일이 된 것 같아요.
진료를 할 때 도와주셨던 많은 팀분들, 또한 많은 언니 오빠들, 현지분들 정말 잊지 못할 것 같아요. 그리고 같이 놀 때 저를 배려해주셨던 언니 오빠들 너무 감사드려요. 세월이 흘러, 만약 제가 아이들을 낳고 기른다면 이런 해외봉사는 한 번 쯤은 가게 해주고 싶어요. 설사, 저처럼 불평불만하고 영혼 없이 가려고 한다고 해도, 어느새 이 기회는 일생의 기억에서 가장 콕 박히는, 사회생활에 나가서 어렸을 적의 해외봉사를 생각하며 피식 웃을 수 있는 가장 소중하고 값진 것이 될것 같아요. 지겹도록 봤던 모기들과 정체모를 벌레들, 울퉁불퉁해서 많은 고통을 안겨주었던 비포장도로, 게스트 하우스에서 식겁을 했던 도마뱀들이, 그땐 정말 보고 싶지 않았는데 다시 일상으로 가니까 사소한 것 하나마저도 너무 그립고 아쉬워요.
정말 제가 해단식때 했던 그 말처럼, 시간만 되고 갈 수 있는 형편만 된다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다시 오고 싶어요. 정말 저에겐 절대로 평범할 수 없는 가장 특별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봉사활동 여행이 되었어요!!! 콤스타 콤스타 파이팅!!!!!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다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