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3번째 해외의료봉사를 다녀와서
최근 들어 여행보다는 해외봉사를 더 많이 갔다 왔었는데 그중에 의료봉사는 이번이 세 번 째였다. 아빠 덕분에 처음 해외봉사를 가봤었는데 그곳들은 신발도 신지 않은 아이들이 많았고 어른들도 거의 자연에 가까운 상태로 지내고 있었다. 문물과 동떨어져있는 상태에 가까웠다. 병원이 아예 없어서 환자들이 많았다. 우리는 깜깜하고 전기도 얼마 없는 곳에서 진료를 보고 침도 놓아주었다. 사람들이 기다리는 동안 지루하지 않도록 언니와 나는 페이스페인팅과 풍선아트를 해주었고, 진료도 사람들이 만족할 정도로 열심히 했고 성공적이었다.
이번 필리핀 해외봉사는, 다 같이 만나거나 여행 갈 시간이 없었던 우리 가족에게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 주었을 뿐더러, 옛날 해외봉사를 갔을 때 행복해했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기대 되었고 어떤 새로운 만남들이 이루어질지 나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다른 해외봉사들을 많이 가서 그런지 비행기 타기 전까지도 해외봉사를 간다는 것이 실감이 나질 않았다. 비행기를 타고 필리핀을 도착해서야 ‘아 내가 정말 필리핀으로 해외봉사를 왔구나.’를 알게 되었다. 우리는 밤늦게 도착하여 호텔에 짐을 풀고 내일 진료를 위해 잠을 잤다.
<진료 1일차>
첫 진료 날, 차가 늦게 오는 바람에 진료장소에 9시 반에 도착을 해보니 기다리는 사람들이 빼곡히 의자에 앉아있었고, 부족해서 서있는 사람들까지 있어 하나같이 너무 놀랐다. 기다리는 사람들은 많은데 준비도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아 접수처부터 진료실, 약국 등을 허둥지둥 준비를 하고 커팅식, 선서 등 형식을 치루고 진료를 시작했다.
원장님들은 1~6으로 번호를 매겨 환자를 받았고 나는 약국을 맡았는데 약도 설명하고 배부하면서 아이들을 위해 사탕과 장난감을 나누어 주는 일을 했다. 약국은 처음에는 환지들이 줄도 없이 복잡했고, 우리들에게 필리핀어도 가르쳐 주지도 않고 악을 줄 때 어떤 말을 하자고도 안 했었기 때문에 혼잡하고 난감했다. 엄마가 약에 대해 설명을 해주면 나는 통역을 맡아 영어로 환자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필리핀은 영어를 잘 쓰는 줄 알았는데 영어를 아는 사람들은 소수였다. 그래서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필리핀 간호사 한명이 약국통역을 같이 하였다. 엄마가 설명하면 내가 영어로 통역하고 그것을 간호사가 필리핀어로 더 확실히 알아듣게 설명하는 시스템이었다. 줄이 없었을 때엔 정말 정신이 없어서 간호사분도 난감해하시고 여러 번 설명을 해야 했다. 목으로 하는 직업인가 생각 되었던 날이었다. 그러나 점점 하다 보니 노하우가 생겨 줄을 세우게 되고 엄마는 약을 챙기고 나는 통역을 맡았다. 그런데 애기들이 많아서 약을 나눠서 먹어야 할 상황이 많았다. 한번 먹을 때마다 4분의 1이나 6분의 1을 먹여야 하는 약 설명이 많아서 사람들께 이해시켜드리기도 어려웠고 계속 서있으니 힘들었다..
여기는 병원이 아주 멀리 있어서인지 아무 질병이나 우리 진료실을 왔다. 정말 다양한 환자들이 많이 왔는데 그중에 감기환자가 제일 많았다. 한번은 고름이 크게 맺힌 아기가 있었는데 그것을 짜서 치료를 했다. 우리언니는 그것을 보고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 우울하다고 했고 나도 그때 받은 가위에 피가 묻혀있어 당황했었다. 나는 피곤한 일들로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봉사에 참여하는 바람에 진료 날 중에 방광염에도 걸려 더 힘들고 지쳐갔다.
점심은 청년들이 직접 해온 한식을 먹었고 그 청년들은 필리핀에 거주하는데 우리를 잠시 도우러 온 것이었다. 청년들은 봉사자들을 위해서는 물을 준비하였고 환자들 중에 애기들을 위해서 과자들을 준비했다.
오후진료는 오전진료보다는 별로 환자가 없어서 세시쯤 일찍 마치고 ,우리가 봉사하던 곳 앞에 시장을 갔다. 그 시장이 이 동네에서 제일 큰 시장이라고 했는데 우리나라의 작은 슈퍼정도 크기 밖에 되지 않았다. 위생이란 것은 없어보였고 신기하게 물고기들을 죄다 죽여서 팔았다. 그리고 고기들에 파리가 붙지 않도록 위에 종이끈을 돌리는 시스템을 이용하였다.
진료가 끝난 후엔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내 인생 처음 먹어본 맛이었고 최고의 식사였다.
<진료2일차>
2일째에는 약국이 제법 수월히 돌아갔기 때문에 나는 접수처에 가서 언니와 원장님을 도왔다. 접수처에서는 양옆에 필리핀사람들이 먼저 가벼운 예진을 하고 진료서 번호를 적어 번호표처럼 사람들을 불렀다. 그 후 언니와 원장님이 영어로 더 자세히 물어서 접수를 받았다. 나는 뒤에서 증상을 보고 약침을 담당하는 원장님께 가야할지 내과를 맡는 원장님께 보내야 할지 정해야했고, 어디에 줄이 별로 없고 자리가 비는지에 따라 배치하는 어려운 일이였다. 이 일을 할 때 사람들에 가려 진료실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의자에 올라가서 지켜봐야 했다. 2일째에도 오래 서있는 일을 하였지만 그래도 접수처 사람들과 친해지고 여러가지 증상을 가진 사람들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또 중간에 시간 날 때마다 아빠를 도와 잠깐의 통역도 해주었고 다른 사람들이 도움이 필요할 때 내가 가서 도왔다.
접수처에 일했던 언니와 원장님은 내가 오기 전까지 예진을 보다가 일어나서 사람이 어디 없는지 보고 다시 앉고를 반복해야 했기 때문에 매우 힘이 들었다고 하였고 내가 와서 도와주어서 굉장히 일이 수월했고 다행이라고 하였다.
여기 필리핀 아이들은 한국인들을 매우 좋아하는 듯 했다. 나를 보면 인사는 물론 미니하트를 만들어서 해주었고 사진을 찍어도 다들 포즈를 잡아주었다. 우리가 진료하는 곳 옆에는 성당이 있었고 그 옆에는 아마 학교가 있었나보다. 오후 진료 때는 우리 진료소 앞에 운동장으로 와서 아이들이 배드민턴을 하거나 축제연습을 하였다. 그 아이들은 중학생쯤으로 보였는데 부끄럼을 많이 탔다. 나를 좋아하긴 하는데 내가 손을 흔들면서 인사를 하면 “꺄악!!”거리면서 자기들끼리 좋아하는 등 연예인 급으로 좋아해서 너무 웃겼다.
또, 진료실 옆에는 큰 강당이 있었는데 2일 째부터 노랫소리가 들려 호기심에 들어가 보았다. 처음에는 아무도 없고 공사만 하는 줄 알았는데 더 들어가 보니 동네사람들이 춤 연습을 하고 있었고 나는 재미있어 혼자 구경을 하였다.
진료를 마친 후 이번에는 포토존이라는 곳을 갔는데 만 송이의 LED장미들이 있는 곳이었다. 우리 한국인이 와서 서울의 DDP처럼 만 송이의 LED장미들을 장식해놓았는데 거기 바다와 하늘이 그 장식들과 어우러져 매우 예뻤다. 포토존의 강 건너에는 우리나라처럼 빌딩들이 있었다. 필리핀은 잘 사는 곳과 못사는 곳의 차이가 아주 많다고 했다.
잘 사는 곳은 망을 보는 사람도 있고 건물이 깨끗하며 마당이 있고 관리자들도 있다. 그런데 못사는 사람들은 허물어가는 폐허에 살고 있다. 그냥 판자를 대고 만든 듯하고 컨테이너박스보다 훨씬 못하고 정말 쓰러질 듯한 집들이 많다. 이발소는 옛날 60년대 이발소같이 작고 아담하고 고기와 생선가게는 파리가 난무한다. 그래도 이전의 봉사장소 보단 나았다. 왜냐하면 필리핀사람들은 신발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소한 차이가 엄청난 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료3일차>
3일째도 접수처에서 일을 했는데 정말 어이없는 환자들이 많이 왔다. 안 아픈데 예전에 아팠어도 왔다는 환자도 있었고, 수술해야하는 질병을 가진 환자와 자기가 나이가 들어서 안 보이는 것을 고쳐달라고 하는 환자도 있었고, 한 달도 안 된 신생아를 데리고 온 엄마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그러나 그 분들을 이해 할 수는 있었다. 이 동네는 병원이 아주 멀리 있고 문명도 발달되지 못하여 어떤 질병이 이 치료에 맞는지도 몰라서 아무 질병이나 걸리면 이 진료실에 오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다양하게 황당한 환자들이 많이 왔다. 그런 황당한 환자들임에도 불구하며 한의사 분들이 잘 대처하고 치료 및 처방을 해주셨다.
정말 덥고 습하고 갖추어진 것들도 정말 없지만 한의사분들이 봉사정신으로 정말 잘 해낸 것 같다. 아빠를 비롯한 한의사분들이 진료를 잘 할 수 있도록 가족들이 도와주었고, 그 속에서 나도 큰 몫을 한 것 같아 뿌듯했다.
나의 3번째 해외의료봉사를 다녀와서
최근 들어 여행보다는 해외봉사를 더 많이 갔다 왔었는데 그중에 의료봉사는 이번이 세 번 째였다. 아빠 덕분에 처음 해외봉사를 가봤었는데 그곳들은 신발도 신지 않은 아이들이 많았고 어른들도 거의 자연에 가까운 상태로 지내고 있었다. 문물과 동떨어져있는 상태에 가까웠다. 병원이 아예 없어서 환자들이 많았다. 우리는 깜깜하고 전기도 얼마 없는 곳에서 진료를 보고 침도 놓아주었다. 사람들이 기다리는 동안 지루하지 않도록 언니와 나는 페이스페인팅과 풍선아트를 해주었고, 진료도 사람들이 만족할 정도로 열심히 했고 성공적이었다.
이번 필리핀 해외봉사는, 다 같이 만나거나 여행 갈 시간이 없었던 우리 가족에게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 주었을 뿐더러, 옛날 해외봉사를 갔을 때 행복해했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기대 되었고 어떤 새로운 만남들이 이루어질지 나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다른 해외봉사들을 많이 가서 그런지 비행기 타기 전까지도 해외봉사를 간다는 것이 실감이 나질 않았다. 비행기를 타고 필리핀을 도착해서야 ‘아 내가 정말 필리핀으로 해외봉사를 왔구나.’를 알게 되었다. 우리는 밤늦게 도착하여 호텔에 짐을 풀고 내일 진료를 위해 잠을 잤다.
<진료 1일차>
첫 진료 날, 차가 늦게 오는 바람에 진료장소에 9시 반에 도착을 해보니 기다리는 사람들이 빼곡히 의자에 앉아있었고, 부족해서 서있는 사람들까지 있어 하나같이 너무 놀랐다. 기다리는 사람들은 많은데 준비도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아 접수처부터 진료실, 약국 등을 허둥지둥 준비를 하고 커팅식, 선서 등 형식을 치루고 진료를 시작했다.
원장님들은 1~6으로 번호를 매겨 환자를 받았고 나는 약국을 맡았는데 약도 설명하고 배부하면서 아이들을 위해 사탕과 장난감을 나누어 주는 일을 했다. 약국은 처음에는 환지들이 줄도 없이 복잡했고, 우리들에게 필리핀어도 가르쳐 주지도 않고 악을 줄 때 어떤 말을 하자고도 안 했었기 때문에 혼잡하고 난감했다. 엄마가 약에 대해 설명을 해주면 나는 통역을 맡아 영어로 환자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필리핀은 영어를 잘 쓰는 줄 알았는데 영어를 아는 사람들은 소수였다. 그래서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필리핀 간호사 한명이 약국통역을 같이 하였다. 엄마가 설명하면 내가 영어로 통역하고 그것을 간호사가 필리핀어로 더 확실히 알아듣게 설명하는 시스템이었다. 줄이 없었을 때엔 정말 정신이 없어서 간호사분도 난감해하시고 여러 번 설명을 해야 했다. 목으로 하는 직업인가 생각 되었던 날이었다. 그러나 점점 하다 보니 노하우가 생겨 줄을 세우게 되고 엄마는 약을 챙기고 나는 통역을 맡았다. 그런데 애기들이 많아서 약을 나눠서 먹어야 할 상황이 많았다. 한번 먹을 때마다 4분의 1이나 6분의 1을 먹여야 하는 약 설명이 많아서 사람들께 이해시켜드리기도 어려웠고 계속 서있으니 힘들었다..
여기는 병원이 아주 멀리 있어서인지 아무 질병이나 우리 진료실을 왔다. 정말 다양한 환자들이 많이 왔는데 그중에 감기환자가 제일 많았다. 한번은 고름이 크게 맺힌 아기가 있었는데 그것을 짜서 치료를 했다. 우리언니는 그것을 보고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 우울하다고 했고 나도 그때 받은 가위에 피가 묻혀있어 당황했었다. 나는 피곤한 일들로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봉사에 참여하는 바람에 진료 날 중에 방광염에도 걸려 더 힘들고 지쳐갔다.
점심은 청년들이 직접 해온 한식을 먹었고 그 청년들은 필리핀에 거주하는데 우리를 잠시 도우러 온 것이었다. 청년들은 봉사자들을 위해서는 물을 준비하였고 환자들 중에 애기들을 위해서 과자들을 준비했다.
오후진료는 오전진료보다는 별로 환자가 없어서 세시쯤 일찍 마치고 ,우리가 봉사하던 곳 앞에 시장을 갔다. 그 시장이 이 동네에서 제일 큰 시장이라고 했는데 우리나라의 작은 슈퍼정도 크기 밖에 되지 않았다. 위생이란 것은 없어보였고 신기하게 물고기들을 죄다 죽여서 팔았다. 그리고 고기들에 파리가 붙지 않도록 위에 종이끈을 돌리는 시스템을 이용하였다.
진료가 끝난 후엔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내 인생 처음 먹어본 맛이었고 최고의 식사였다.
<진료2일차>
2일째에는 약국이 제법 수월히 돌아갔기 때문에 나는 접수처에 가서 언니와 원장님을 도왔다. 접수처에서는 양옆에 필리핀사람들이 먼저 가벼운 예진을 하고 진료서 번호를 적어 번호표처럼 사람들을 불렀다. 그 후 언니와 원장님이 영어로 더 자세히 물어서 접수를 받았다. 나는 뒤에서 증상을 보고 약침을 담당하는 원장님께 가야할지 내과를 맡는 원장님께 보내야 할지 정해야했고, 어디에 줄이 별로 없고 자리가 비는지에 따라 배치하는 어려운 일이였다. 이 일을 할 때 사람들에 가려 진료실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의자에 올라가서 지켜봐야 했다. 2일째에도 오래 서있는 일을 하였지만 그래도 접수처 사람들과 친해지고 여러가지 증상을 가진 사람들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또 중간에 시간 날 때마다 아빠를 도와 잠깐의 통역도 해주었고 다른 사람들이 도움이 필요할 때 내가 가서 도왔다.
접수처에 일했던 언니와 원장님은 내가 오기 전까지 예진을 보다가 일어나서 사람이 어디 없는지 보고 다시 앉고를 반복해야 했기 때문에 매우 힘이 들었다고 하였고 내가 와서 도와주어서 굉장히 일이 수월했고 다행이라고 하였다.
여기 필리핀 아이들은 한국인들을 매우 좋아하는 듯 했다. 나를 보면 인사는 물론 미니하트를 만들어서 해주었고 사진을 찍어도 다들 포즈를 잡아주었다. 우리가 진료하는 곳 옆에는 성당이 있었고 그 옆에는 아마 학교가 있었나보다. 오후 진료 때는 우리 진료소 앞에 운동장으로 와서 아이들이 배드민턴을 하거나 축제연습을 하였다. 그 아이들은 중학생쯤으로 보였는데 부끄럼을 많이 탔다. 나를 좋아하긴 하는데 내가 손을 흔들면서 인사를 하면 “꺄악!!”거리면서 자기들끼리 좋아하는 등 연예인 급으로 좋아해서 너무 웃겼다.
또, 진료실 옆에는 큰 강당이 있었는데 2일 째부터 노랫소리가 들려 호기심에 들어가 보았다. 처음에는 아무도 없고 공사만 하는 줄 알았는데 더 들어가 보니 동네사람들이 춤 연습을 하고 있었고 나는 재미있어 혼자 구경을 하였다.
진료를 마친 후 이번에는 포토존이라는 곳을 갔는데 만 송이의 LED장미들이 있는 곳이었다. 우리 한국인이 와서 서울의 DDP처럼 만 송이의 LED장미들을 장식해놓았는데 거기 바다와 하늘이 그 장식들과 어우러져 매우 예뻤다. 포토존의 강 건너에는 우리나라처럼 빌딩들이 있었다. 필리핀은 잘 사는 곳과 못사는 곳의 차이가 아주 많다고 했다.
잘 사는 곳은 망을 보는 사람도 있고 건물이 깨끗하며 마당이 있고 관리자들도 있다. 그런데 못사는 사람들은 허물어가는 폐허에 살고 있다. 그냥 판자를 대고 만든 듯하고 컨테이너박스보다 훨씬 못하고 정말 쓰러질 듯한 집들이 많다. 이발소는 옛날 60년대 이발소같이 작고 아담하고 고기와 생선가게는 파리가 난무한다. 그래도 이전의 봉사장소 보단 나았다. 왜냐하면 필리핀사람들은 신발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소한 차이가 엄청난 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료3일차>
3일째도 접수처에서 일을 했는데 정말 어이없는 환자들이 많이 왔다. 안 아픈데 예전에 아팠어도 왔다는 환자도 있었고, 수술해야하는 질병을 가진 환자와 자기가 나이가 들어서 안 보이는 것을 고쳐달라고 하는 환자도 있었고, 한 달도 안 된 신생아를 데리고 온 엄마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그러나 그 분들을 이해 할 수는 있었다. 이 동네는 병원이 아주 멀리 있고 문명도 발달되지 못하여 어떤 질병이 이 치료에 맞는지도 몰라서 아무 질병이나 걸리면 이 진료실에 오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다양하게 황당한 환자들이 많이 왔다. 그런 황당한 환자들임에도 불구하며 한의사 분들이 잘 대처하고 치료 및 처방을 해주셨다.
정말 덥고 습하고 갖추어진 것들도 정말 없지만 한의사분들이 봉사정신으로 정말 잘 해낸 것 같다. 아빠를 비롯한 한의사분들이 진료를 잘 할 수 있도록 가족들이 도와주었고, 그 속에서 나도 큰 몫을 한 것 같아 뿌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