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나라 이웃나라 미얀마를 다녀와서
나는 미얀마 대사관 옆에 산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도 건물이 꾀죄죄해 대사관인지도 모를 정도인데, 높이 게양된 원색의 미얀마 국기와 건물 한 켠에 조그맣게자리한 경찰초소가 대사관임을 조용히 알린다. 가끔 이 곳 앞에서는 일요일마다 농성이 열리는데, 이국말이라 알아들을 길은 없으나 높으신 분들께 불만이 가득한 건 어느 나라나 매한가지인가보다, 하고 생각하곤 한다.
여느 날처럼 집에 걸어들어가던 길이었다. 대사관 앞 길바닥에 떨어진 노란색 지갑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몇 초 간 뒤진 결과 내가 얻은 정보는, 한 미얀마 여자가 자국의 어디론가 보낼 계획이었던 100만원 가량의 현금을 잃어버렸다는 것. 묻고 따질 것도 없이 바로 대사관 옆 경비초소에 맡긴 후, 완전히 잊고 지내고있었다.
며칠 후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대사관에 근무하는 한국경찰이었다. 그 내용인 즉슨, 지갑의 주인이 1년 안에 나타나지 않을 경우 습득자인 내가 소유권을취득할 수 있다는 거였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생각했고 통화 중에 그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밝혔다. 그 와중 경찰의 마지막 말이 뇌리에 남았다. “그렇죠 100만원이면 미얀마 사람한텐 무지 큰 돈이긴 하죠.”
당시 나는 한의사로서는 다소 따분한 삶을 살고 있었다. 어쩌다 대진이 들어오는 날이면 고급 위스키 한 병 살 돈 정도는 너무 쉽게 내 손에 들어왔다. 내 환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니 공부도 안 하게 되었다. 스스로 뭔가 한계에 다다랐다고 생각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의료인으로서 가장 벅찼던 순간을 떠올려야 할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학생 때 의료 봉사를 갔던 경험이었다.
잠 안 오는 새벽, 묵은 기억 속에서 콤스타라는 게 있었다는 걸 끄집어냈고 홀린듯이 컴퓨터를 켰다. 홈페이지에는 거짓말처럼 공고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 바로 나의 이웃나라 미얀마로 떠나는 의료봉사. 게다가 당장 내일이 모집 마감날이었다. 이것은 어쩐지 일종의 계시처럼 여겨졌고, 맥북으로 어떻게 문서를 수정하는지를 몰라 허겁지겁 근처 피시방에 들어가 서류를 전송했다. 내가 느끼기에도 그리 의욕적인 것은 참 간만이었다. 그렇게 나는 미얀마 봉사의 마지막 멤버로 합류하게 되었다.
공항에서의 첫 미팅 날, 꽤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오랜 경력의 원장님들부터 동년배 한의사들, 한의대 후배들, 그리고 중학생 친구들까지. 각자의 사연이 궁금했지만 서먹서먹한 가운데 눈빛으로만 그 다짐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만 해도 이렇게 어마어마한 여정이 될 줄은 모두 꿈에도 몰랐으리라.
서로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는 시간을 처음으로 가지게 된 건 도착 이튿 날 밤 진료부장님이 마련하신 자리에서였다. 봉사에 참가하게 된 계기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의료진 중에 가장 어린 내가 먼저 운을 뗐다. 지금까지 위에 썼던 내용을 담담하게 얘기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한 명 한 명씩 각자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한 마음 한 뜻의 위력이라는 게 굳이 말하지 않아도 공기 중에 감돌았다. 우리는 진료에 대한 긴장감을 벗고, 부드럽고도 자연스럽게 의기를 한 데 모았다.
아침이 밝았고, 우리가 3일 간 의료활동을 펼치게 될 양곤 전통의학병원에 도착했다. 건물은 낡았지만, 쾌적하고도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침 댓바람부터 우리를 기다린 수 백 명의 환자들이 합장을 하고 우리가 지나갈 때마다 경의를 표했다. 마치 연예인이 된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여담이지만 사실 의사는 어떤 의미에서 환자들의 스타다. 환자들이 으쌰으쌰해주면 아무리 지쳐도 환자 볼 힘이 어딘가에서 솟아나곤 한다. 공백 기간을 가진 연예인들이 자꾸만 무대 위로 돌아오곤 하는 게 바로 그런 이유가 아닐까. 나도 가끔은 환자가, 그 침대가 미친듯이 그립다. 한 단원의 복창 아래 잠깐의 선서시간을 가진 후, 오전 진료가 개시되었다. 내 담당 통역사 분의 한국어는 아주 훌륭해서 환자와의 소통에 전혀 무리가 없었다. 오전에는 마치 리허설을 하는 느낌으로 모두들 진료 시스템에 차차 적응해가고 있었다. 어느덧 환자챠트도 빼곡히 쌓여갔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져 환자들이 잦아들 무렵, 한 소녀가 찾아왔다. 한쪽 안검이 완전히 내려 앉았는데,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고. 처치를 바라는 건 아니고 그냥 원장님께 보여드리고 싶었다고 했다. 시력에 큰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외과적 성형술을 추천해주었으나, 그 소녀가 앞으로 어떤 수술도 하지 못할 것임을나도 알고 소녀도 알았다. 그렇지만 그 소녀는 집에 돌아가 부모님께 자랑할 것이다. 엄마 의사선생님이 아무 문제가 없대, 괜찮대. 우리는 때로 그저 마냥 괜찮다고 말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동안 많이 불편했지, 사실은 넌 이대로도 아름다워. 그리고 괜찮아, 전부 다.
어떤 환자는 큰 병원에 가보아야 할 것 같았다. 당장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떤 환자는 한 달 월급을 몽땅 털어 이 곳 까지 달려왔으나 고열로 인해 입구에서 거절당했다.(인플루엔자 창궐로 고열환자는 걸러야만 했다. 참고로 미얀마인들의 평균 소득은 월 20만원 정도이다.) 저마다 얼마나 기다려온 순간인지 알기에, 그만 마음이 저려왔다. 내가 이름도 기억 못하는 어떤 환자에게는 평생의 순간이요 기억일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알기에 침 한군데 한군데 허투루 놓을 수 없었다. 통역이 좀 고생을 했지만, 최대한 자세히 물어보고 확인하려했다. 에어컨도 없는 찜통 날씨에 두꺼운 가운을 입고있으려니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지만 차라리 그것은 열매같았다.
사실 긍휼지심이라든지 봉사라든지, 의술을 '베푼다'든지 하는 표현은 지극히 일방향적인 느낌이다. 새벽 3시부터 기다려 준 환자들을 생각하면 감히 그런 표현을 쓸 수 없다. 되려 기다리다 병이 날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으니까. 마침내 따뜻한 손으로 환자의 차가운 살을 감싸고 자침을 할 때에, 내 위에서 폭죽같은 것이 터지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의 꿈은 그 잘난 대학도 아니, 빳빳한 의사면허증도 아니, 바로 당장 이 침대 위 이 순간이라는 것을.
마지막 날 진료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는 버스 창 밖으로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환자들을 보았다. 그 광경을 보고 어떤 후배는 울먹였다. 버스가 마을 어귀를 벗어나기 까지 창 밖의 모든 주민이 우리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찰나였지만, 그 찰나가 존재했었다는 기억으로 어떤 사람들의 관계는 지탱될 때가 있다. 이 잠깐의 눈빛 교환으로도 우리는 평생 서로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가족에게, 또 친구에게 이야기할 것이다. 내 인생에 이런 사람들이 존재했노라고.
귀국 후 공항 도착층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마음 여린 누군가는 끝이라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며 눈물을 보였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는 끝이 나지 않은 느낌이었다. 아쉬워할 새도 없이 돌아와서 글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 주변에 얘기하는 것도 봉사의 본질이지만, 기록의 형태로 남겨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하는 것이 보다 높은 차원의 봉사라는 믿음이 있다. 한 번의 경험으로 얻은 가치를 지속적으로 널리 이롭게 한다면, 나의 기쁨은 더더욱 큰 보람으로 영글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실 캠페인의 본질도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선행이란 본디 몰래해서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아, 내 주위에 이렇게 사는 사람이 있었지- 라는 최초의 목격이 나비효과처럼 번져나가 도움을 건네는 당신의 손길이 되는 것이다.
아마 나의 수기는 누군가에겐 아예 읽히지 못한 채로 사장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원장님들이 계시다면, 본인의 진료 인생에서 가장 벅찬 순간이 언제였는지 떠올려보시기를 감히 당부드린다. 그 시도 자체가 뜻밖의 열쇠가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 말이다.
먼나라 이웃나라 미얀마를 다녀와서
나는 미얀마 대사관 옆에 산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도 건물이 꾀죄죄해 대사관인지도 모를 정도인데, 높이 게양된 원색의 미얀마 국기와 건물 한 켠에 조그맣게자리한 경찰초소가 대사관임을 조용히 알린다. 가끔 이 곳 앞에서는 일요일마다 농성이 열리는데, 이국말이라 알아들을 길은 없으나 높으신 분들께 불만이 가득한 건 어느 나라나 매한가지인가보다, 하고 생각하곤 한다.
여느 날처럼 집에 걸어들어가던 길이었다. 대사관 앞 길바닥에 떨어진 노란색 지갑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몇 초 간 뒤진 결과 내가 얻은 정보는, 한 미얀마 여자가 자국의 어디론가 보낼 계획이었던 100만원 가량의 현금을 잃어버렸다는 것. 묻고 따질 것도 없이 바로 대사관 옆 경비초소에 맡긴 후, 완전히 잊고 지내고있었다.
며칠 후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대사관에 근무하는 한국경찰이었다. 그 내용인 즉슨, 지갑의 주인이 1년 안에 나타나지 않을 경우 습득자인 내가 소유권을취득할 수 있다는 거였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생각했고 통화 중에 그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밝혔다. 그 와중 경찰의 마지막 말이 뇌리에 남았다. “그렇죠 100만원이면 미얀마 사람한텐 무지 큰 돈이긴 하죠.”
당시 나는 한의사로서는 다소 따분한 삶을 살고 있었다. 어쩌다 대진이 들어오는 날이면 고급 위스키 한 병 살 돈 정도는 너무 쉽게 내 손에 들어왔다. 내 환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니 공부도 안 하게 되었다. 스스로 뭔가 한계에 다다랐다고 생각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의료인으로서 가장 벅찼던 순간을 떠올려야 할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학생 때 의료 봉사를 갔던 경험이었다.
잠 안 오는 새벽, 묵은 기억 속에서 콤스타라는 게 있었다는 걸 끄집어냈고 홀린듯이 컴퓨터를 켰다. 홈페이지에는 거짓말처럼 공고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 바로 나의 이웃나라 미얀마로 떠나는 의료봉사. 게다가 당장 내일이 모집 마감날이었다. 이것은 어쩐지 일종의 계시처럼 여겨졌고, 맥북으로 어떻게 문서를 수정하는지를 몰라 허겁지겁 근처 피시방에 들어가 서류를 전송했다. 내가 느끼기에도 그리 의욕적인 것은 참 간만이었다. 그렇게 나는 미얀마 봉사의 마지막 멤버로 합류하게 되었다.
공항에서의 첫 미팅 날, 꽤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오랜 경력의 원장님들부터 동년배 한의사들, 한의대 후배들, 그리고 중학생 친구들까지. 각자의 사연이 궁금했지만 서먹서먹한 가운데 눈빛으로만 그 다짐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만 해도 이렇게 어마어마한 여정이 될 줄은 모두 꿈에도 몰랐으리라.
서로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는 시간을 처음으로 가지게 된 건 도착 이튿 날 밤 진료부장님이 마련하신 자리에서였다. 봉사에 참가하게 된 계기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의료진 중에 가장 어린 내가 먼저 운을 뗐다. 지금까지 위에 썼던 내용을 담담하게 얘기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한 명 한 명씩 각자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한 마음 한 뜻의 위력이라는 게 굳이 말하지 않아도 공기 중에 감돌았다. 우리는 진료에 대한 긴장감을 벗고, 부드럽고도 자연스럽게 의기를 한 데 모았다.
아침이 밝았고, 우리가 3일 간 의료활동을 펼치게 될 양곤 전통의학병원에 도착했다. 건물은 낡았지만, 쾌적하고도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침 댓바람부터 우리를 기다린 수 백 명의 환자들이 합장을 하고 우리가 지나갈 때마다 경의를 표했다. 마치 연예인이 된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여담이지만 사실 의사는 어떤 의미에서 환자들의 스타다. 환자들이 으쌰으쌰해주면 아무리 지쳐도 환자 볼 힘이 어딘가에서 솟아나곤 한다. 공백 기간을 가진 연예인들이 자꾸만 무대 위로 돌아오곤 하는 게 바로 그런 이유가 아닐까. 나도 가끔은 환자가, 그 침대가 미친듯이 그립다. 한 단원의 복창 아래 잠깐의 선서시간을 가진 후, 오전 진료가 개시되었다. 내 담당 통역사 분의 한국어는 아주 훌륭해서 환자와의 소통에 전혀 무리가 없었다. 오전에는 마치 리허설을 하는 느낌으로 모두들 진료 시스템에 차차 적응해가고 있었다. 어느덧 환자챠트도 빼곡히 쌓여갔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져 환자들이 잦아들 무렵, 한 소녀가 찾아왔다. 한쪽 안검이 완전히 내려 앉았는데,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고. 처치를 바라는 건 아니고 그냥 원장님께 보여드리고 싶었다고 했다. 시력에 큰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외과적 성형술을 추천해주었으나, 그 소녀가 앞으로 어떤 수술도 하지 못할 것임을나도 알고 소녀도 알았다. 그렇지만 그 소녀는 집에 돌아가 부모님께 자랑할 것이다. 엄마 의사선생님이 아무 문제가 없대, 괜찮대. 우리는 때로 그저 마냥 괜찮다고 말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동안 많이 불편했지, 사실은 넌 이대로도 아름다워. 그리고 괜찮아, 전부 다.
어떤 환자는 큰 병원에 가보아야 할 것 같았다. 당장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떤 환자는 한 달 월급을 몽땅 털어 이 곳 까지 달려왔으나 고열로 인해 입구에서 거절당했다.(인플루엔자 창궐로 고열환자는 걸러야만 했다. 참고로 미얀마인들의 평균 소득은 월 20만원 정도이다.) 저마다 얼마나 기다려온 순간인지 알기에, 그만 마음이 저려왔다. 내가 이름도 기억 못하는 어떤 환자에게는 평생의 순간이요 기억일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알기에 침 한군데 한군데 허투루 놓을 수 없었다. 통역이 좀 고생을 했지만, 최대한 자세히 물어보고 확인하려했다. 에어컨도 없는 찜통 날씨에 두꺼운 가운을 입고있으려니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지만 차라리 그것은 열매같았다.
사실 긍휼지심이라든지 봉사라든지, 의술을 '베푼다'든지 하는 표현은 지극히 일방향적인 느낌이다. 새벽 3시부터 기다려 준 환자들을 생각하면 감히 그런 표현을 쓸 수 없다. 되려 기다리다 병이 날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으니까. 마침내 따뜻한 손으로 환자의 차가운 살을 감싸고 자침을 할 때에, 내 위에서 폭죽같은 것이 터지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의 꿈은 그 잘난 대학도 아니, 빳빳한 의사면허증도 아니, 바로 당장 이 침대 위 이 순간이라는 것을.
마지막 날 진료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는 버스 창 밖으로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환자들을 보았다. 그 광경을 보고 어떤 후배는 울먹였다. 버스가 마을 어귀를 벗어나기 까지 창 밖의 모든 주민이 우리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찰나였지만, 그 찰나가 존재했었다는 기억으로 어떤 사람들의 관계는 지탱될 때가 있다. 이 잠깐의 눈빛 교환으로도 우리는 평생 서로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가족에게, 또 친구에게 이야기할 것이다. 내 인생에 이런 사람들이 존재했노라고.
귀국 후 공항 도착층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마음 여린 누군가는 끝이라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며 눈물을 보였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는 끝이 나지 않은 느낌이었다. 아쉬워할 새도 없이 돌아와서 글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 주변에 얘기하는 것도 봉사의 본질이지만, 기록의 형태로 남겨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하는 것이 보다 높은 차원의 봉사라는 믿음이 있다. 한 번의 경험으로 얻은 가치를 지속적으로 널리 이롭게 한다면, 나의 기쁨은 더더욱 큰 보람으로 영글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실 캠페인의 본질도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선행이란 본디 몰래해서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아, 내 주위에 이렇게 사는 사람이 있었지- 라는 최초의 목격이 나비효과처럼 번져나가 도움을 건네는 당신의 손길이 되는 것이다.
아마 나의 수기는 누군가에겐 아예 읽히지 못한 채로 사장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원장님들이 계시다면, 본인의 진료 인생에서 가장 벅찬 순간이 언제였는지 떠올려보시기를 감히 당부드린다. 그 시도 자체가 뜻밖의 열쇠가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