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렸을 때부터 한의사인 아버지를 보고 한의사는 나의 꿈의 일부분이 되었다.(4살 때 방석에 이쑤시개를 꽂아 아빠 침 놓는 흉내를 냈다니 그 때부터 시작되었나...) 더욱이 아빠의 무의탁노인들이나 장애인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시는 모습은 나에게 크게 각인이 되어, 남을 위해 봉사 배려하는 멋진 한의사가 나의 장래희망이 되었다. 이런 나에게 아주 좋은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아빠가 속해 있는 한의사 봉사활동 단체인 KOMSTA(대한한방해외의료봉사단)에서 몽골로 해외봉사를 가는 것이었다. 2010년 8월 7일 KOMSTA는 8박 9일로 몽골로 100차 한방의료봉사를 하는데 단장인 아빠와 같이 동참하게 되었다. 이번 활동은 100회 라 다른 때보다 더 특별했다. 평소 한의사들만 갔는데 이번에는 가족들까지 62명이 갔다. 그리고 우리는 의료봉사 뿐만 아니라 가나안학교로 파견 가서 거기서 애들도 가르쳤다. 나는 말이 안통해도 잘할 수 있고 결과물이 확실히 나오는 종이접기를 가르치기로 했고, 다른 선생님(김성진 음악선생님) 한 분은 리코더를 가르쳤다.
몽골에 도착하고 둘째 날부터 다섯째 날까지 우리의 봉사활동은 계속 지속되었다. 첫째 날은 일요일이어서 수업은 안하고 진료만 하였다. 나와 다른 가족들은 전문 한의사가 아니었기에 입구에서 번호표를 나눠주거나 진료실 안내를 하거나 한의사 선생님의 도움이가 되거나 약제실에서 일했다. 첫날은 일요일이라 사람이 얼마 없어서 모두가 약제실에서 일했다. 몇 명의 통역사 들이 있었지만 약제실에서는 중요한 것 몇 개만 써놓고 우리가 간단한 말을 배워서 했다. 하면서 많은 몽골 현지인을 만나고 웃으면서 간단한 대화를 하고 약을 드리고 아이들이랑은 같이 어울리고...
봉사 둘째 날부터 나와 리코더 선생님은 본격적으로 수업을 시작하였다. 수업은 아침에 시작해서 점심시간 전까지 진행되었다. 같이 봉사활동을 했던 정연이 언니랑 민선이도 보조로 도와주었다. 첫 교시는 리코더 선생님의 수업으로 리코더를 했다. 나도 수업에 참가하여 보조 역할을 하였다. 처음 리코더를 보는 아이들도 있었고 이미 해본 아이들도 있었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신기해하고 재미있어 했다. 한국 동요도 알려주고 몽골노래도 알려주고 수업하다보니 아이들 모두는 수업에 빠져있었다. 그리고 내 종이접기 수업에는 선생님, 언니, 민선이가 보조로 도와주었다. 처음에는 나도 배우는 고등학생인데 애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지만 막상 수업을 시작하고 나니 나에게 집중하는 아이들과 내가 가르쳐 줄 때마다 신기해서 더하려는 아이들을 보고 나는 막힘없이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처음에 봉사활동이나 수업을 시작했을 때는 말도 안통하고 처음 해보는 일이여서 많이 당황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만 막상 시작해서 부딪혀보니 막힘없이 뚫렸다. 또 거기 몽골 분들도 우리를 믿고 따라주고 도와 주셔서 쉽게 진행되었다.
오전에는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진료를 하다 보니 진료할 때마다 수업시간에 배우러 왔던 애들이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바쁜 와중에도 애들과 같이 놀고 같이 어울렸다. 시간이 날 때는 애들과 같이 농구도 하고 최대한으로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그러다보니 하루가 지날수록 애들과 정이 들었다. 비록 봉사는 4일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4주를 같이 한 것 같았다. 정이 많이 들었는지 몽골아이들 몇몇은 우리와 선물도 주고받았다. 그리고 심지어 마지막 날에는 몽고 친구들과 헤어진다는 생각에 우리는 서로 껴안고 울었다. 사람은 언어나 형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 하나로도 서로 통할 수 있고 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비록 4일 밖에 안 되는 봉사활동 이었지만 우리의 의료봉사나 우리의 활동이 조그마한 한국 민간외교라는 생각으로 내 마음의 정성을 다했다. 그래서 아마 우리가 몽골 사람들하고 말은 안통해도 서로 마음으로 통했던 것 같다. 보통 사람들은 봉사활동 하면 불쌍한 사람을 돕는 것 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저 동정에 불과하다. 내가 느낀 것은 봉사활동이 아니라 오랫동안 사귀었던 친구를 돕고 함께 우정을 나눈 것 같은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몽고 한방의료봉사를 다녀와서 분당고등학교 1학년 이채연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한의사인 아버지를 보고 한의사는 나의 꿈의 일부분이 되었다.(4살 때 방석에 이쑤시개를 꽂아 아빠 침 놓는 흉내를 냈다니 그 때부터 시작되었나...) 더욱이 아빠의 무의탁노인들이나 장애인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시는 모습은 나에게 크게 각인이 되어, 남을 위해 봉사 배려하는 멋진 한의사가 나의 장래희망이 되었다. 이런 나에게 아주 좋은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아빠가 속해 있는 한의사 봉사활동 단체인 KOMSTA(대한한방해외의료봉사단)에서 몽골로 해외봉사를 가는 것이었다.
2010년 8월 7일 KOMSTA는 8박 9일로 몽골로 100차 한방의료봉사를 하는데 단장인 아빠와 같이 동참하게 되었다. 이번 활동은 100회 라 다른 때보다 더 특별했다. 평소 한의사들만 갔는데 이번에는 가족들까지 62명이 갔다. 그리고 우리는 의료봉사 뿐만 아니라 가나안학교로 파견 가서 거기서 애들도 가르쳤다. 나는 말이 안통해도 잘할 수 있고 결과물이 확실히 나오는 종이접기를 가르치기로 했고, 다른 선생님(김성진 음악선생님) 한 분은 리코더를 가르쳤다.
몽골에 도착하고 둘째 날부터 다섯째 날까지 우리의 봉사활동은 계속 지속되었다. 첫째 날은 일요일이어서 수업은 안하고 진료만 하였다. 나와 다른 가족들은 전문 한의사가 아니었기에 입구에서 번호표를 나눠주거나 진료실 안내를 하거나 한의사 선생님의 도움이가 되거나 약제실에서 일했다. 첫날은 일요일이라 사람이 얼마 없어서 모두가 약제실에서 일했다. 몇 명의 통역사 들이 있었지만 약제실에서는 중요한 것 몇 개만 써놓고 우리가 간단한 말을 배워서 했다. 하면서 많은 몽골 현지인을 만나고 웃으면서 간단한 대화를 하고 약을 드리고 아이들이랑은 같이 어울리고...
봉사 둘째 날부터 나와 리코더 선생님은 본격적으로 수업을 시작하였다. 수업은 아침에 시작해서 점심시간 전까지 진행되었다. 같이 봉사활동을 했던 정연이 언니랑 민선이도 보조로 도와주었다. 첫 교시는 리코더 선생님의 수업으로 리코더를 했다. 나도 수업에 참가하여 보조 역할을 하였다. 처음 리코더를 보는 아이들도 있었고 이미 해본 아이들도 있었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신기해하고 재미있어 했다. 한국 동요도 알려주고 몽골노래도 알려주고 수업하다보니 아이들 모두는 수업에 빠져있었다. 그리고 내 종이접기 수업에는 선생님, 언니, 민선이가 보조로 도와주었다. 처음에는 나도 배우는 고등학생인데 애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지만 막상 수업을 시작하고 나니 나에게 집중하는 아이들과 내가 가르쳐 줄 때마다 신기해서 더하려는 아이들을 보고 나는 막힘없이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처음에 봉사활동이나 수업을 시작했을 때는 말도 안통하고 처음 해보는 일이여서 많이 당황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만 막상 시작해서 부딪혀보니 막힘없이 뚫렸다. 또 거기 몽골 분들도 우리를 믿고 따라주고 도와 주셔서 쉽게 진행되었다.
오전에는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진료를 하다 보니 진료할 때마다 수업시간에 배우러 왔던 애들이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바쁜 와중에도 애들과 같이 놀고 같이 어울렸다. 시간이 날 때는 애들과 같이 농구도 하고 최대한으로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그러다보니 하루가 지날수록 애들과 정이 들었다. 비록 봉사는 4일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4주를 같이 한 것 같았다. 정이 많이 들었는지 몽골아이들 몇몇은 우리와 선물도 주고받았다. 그리고 심지어 마지막 날에는 몽고 친구들과 헤어진다는 생각에 우리는 서로 껴안고 울었다. 사람은 언어나 형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 하나로도 서로 통할 수 있고 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비록 4일 밖에 안 되는 봉사활동 이었지만 우리의 의료봉사나 우리의 활동이 조그마한 한국 민간외교라는 생각으로 내 마음의 정성을 다했다. 그래서 아마 우리가 몽골 사람들하고 말은 안통해도 서로 마음으로 통했던 것 같다. 보통 사람들은 봉사활동 하면 불쌍한 사람을 돕는 것 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저 동정에 불과하다. 내가 느낀 것은 봉사활동이 아니라 오랫동안 사귀었던 친구를 돕고 함께 우정을 나눈 것 같은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