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리아 장기초등학교 6학년 김 유 진
8월 7일부터 15일까지 우리 가족은 몽골로 의료봉사를 하러 갔다. 우리가족은 내가 어렸을 때 2001년부터 2004년까지 3년이나 몽골에 살았다고 한다. 가끔씩 엄마와 아빠가 집에서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화를 하면서 웃으시곤 했는데 그게 몽골 말 이라고 했었다. 부모님은 몽골에 대한 그리움이 매년 부풀어 오르고 있었지만 나는 중요한 과거가 아니면 다 잊어버리는 편이라 몽골에 대한 기억도 얼마 남지 않아서 그립고 꼭 가야 한다는 생각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나는 만사의 귀찮은 편이라 몽골에 가는 것 까지도 의료봉사라는 것 말고는 별 의미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가서 있었던 중이나 끝나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우리는 토요일 밤 늦게 몽골에 도착했는데 바로 다음날부터 진료를 한다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한몽친선 한방병원으로 갔다. 그 병원이 처음 생길 때부터 아빠가 근무를 했던 곳이라고 아빠가 설명을 해 줬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많은 몽골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는데 아빠가 진료할 때 옆에서 도와 달라고 해서 나는 아빠 진료실에서 일을 하기로 하고 엄마와 내 동생 유빈이는 약국에서 일을 하기로 했다. 아빠 진료실 에서는 아빠가 2001-2004년까지 진료를 할 때 같이 근무를 했다는 몽골의사인 더여 선생님이 와있었다. 그 몽골 선생님과 아빠는 너무 반가워 하며서 좋아했다. 아빠와 더여 선생님은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환자들을 진료했고 아빠가 침을 놓을 때 내가 옆에서 침도주고 또 필요한 것이 있으면 아빠께 가져다 주고 했는데 계속 서서 일을 하다 보니 다리도 아프고 피곤했다.
둘째 날부터는 그래도 조금은 익숙해져서 덜 힘들었던 것 같다.
셋째 날에는 아빠는 진료를 하고 엄마, 동생, 나는 다른 몽골 집에 갔었다. 어트거 이모라는데 우리가 몽골에 살 때 내가 어렸는데 그때 나를 키워 줬다고 했다. 엄마랑 어트거 이모는 서로 눈물을 글썽이며 반가워했는데 나는 몽골 말도 모르고 어트거 이모도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저녁에는 어트거 이모가 우리 가족 옷을 가지고 호텔에 찾아 왔는데 내 동생 유빈이가 옷을 너무 좋아했다. 엄마 아빠는 그 옷이 엄청 비싼 캐시미어라고 하면서 어트거 이모한에 너무 고맙다고 했다. 내 옷도 예쁘고 마음에 들었다.
넷째 날에는 외국인 의사가 아빠를 찾아 왔다. 아빠가 몽골에 근무할 때 같이 공부했던 독일 의사라고 했는데 아빠랑 너무 반가워했다. 넷째 날에는 아빠 진료실에서 아빠, 더여 선생님, 욜기 선생님(독일의사), 또 다른 몽골 의사 등 4명이서 진료를 했다. 방이 좁고 뜸 냄새로 나는 힘들었는데 아빠랑 다른 의사들은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몽골말로 진료도 하고 서로 이야기도 하면서 너무들 즐거워했다. 욜기 선생님이 아빠에게 몽골 전통 옷을 선물 했는데 내가 입어 보니 나한테도 맞아서 친구들과 총싸움 놀이 할 때 방탄복으로 입기 딱 좋을 것 같았다.
진료가 끝나고 몽골 시골로 여행을 갔는데 계속 비가 왔다. 몽골 시골은 가도가도 끝이 없는 초원이었다. 산에 나무는 없고 온통 풀로만 덮여 있었는데 하루 종일 차를 타고 가도 나무가 있는 산은 볼 수가 없었다. 여행 마지막 날에 비가 그쳐서 다행히 말을 탈 수 있었다. 처음에는 너무 무서웠는데 몽골 아저씨가 내가 탄 말고삐를 잡고 가다 보니 차츰 무섭기 보다는 재미있어 졌다. 같이 진료했던 선생님들과 우리 가족과 함께 말을 타고 초원을 달려 보니 우리 담임선생님이 제일 존경하는 징기스칸이 생각났다. 개학하면 담임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몽골에서 말 타고 낙타 탔던 것을 얘기해 줘야겠다.
여러 날 동안 아침 일찍 일어나 병원 가는 것도 달갑지 않았지만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고 내가 고생한 만큼 경치도 구경하고 말도타고 낙타도 타고 침대에서 늦잠도 자고는 등 많은 행복을 얻어서 즐겁기도 했지만 거의 봉사활동의 의미로 간 것이지 놀러 간 것은 아니기 때문에 봉사활동을 할 때가 제일보람 있었고 할 일을 한 거라고 느꼈다. 그리고 몽골 사람들이 끝나고 아빠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들을 때는 기분이 하늘을 나는 듯이 기뻤다. 이때 처음으로 누굴 도와주고 얻는 의사의 보람이란 걸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어 행복했다.
비록 귀찮기도 하고 힘든 일도 있었지만 한의사가 되고 싶은 장래희망에 대한 열정은 있었던 지라 의료봉사를 할 때가 제일 즐겁고 신이 났었다. 이번 의료 봉사를 통해 집에서의 아빠가 아닌 의사로서의, 다른 사람을 치료하여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사명갑을 가지고 일하시는 아빠의 모습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나중에 또 봉사활동에 갈 기회가 오면 이번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봉사활동에 참여해야 겠다.
몽골리아 장기초등학교 6학년 김 유 진
8월 7일부터 15일까지 우리 가족은 몽골로 의료봉사를 하러 갔다. 우리가족은 내가 어렸을 때 2001년부터 2004년까지 3년이나 몽골에 살았다고 한다. 가끔씩 엄마와 아빠가 집에서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화를 하면서 웃으시곤 했는데 그게 몽골 말 이라고 했었다. 부모님은 몽골에 대한 그리움이 매년 부풀어 오르고 있었지만 나는 중요한 과거가 아니면 다 잊어버리는 편이라 몽골에 대한 기억도 얼마 남지 않아서 그립고 꼭 가야 한다는 생각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나는 만사의 귀찮은 편이라 몽골에 가는 것 까지도 의료봉사라는 것 말고는 별 의미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가서 있었던 중이나 끝나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우리는 토요일 밤 늦게 몽골에 도착했는데 바로 다음날부터 진료를 한다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한몽친선 한방병원으로 갔다. 그 병원이 처음 생길 때부터 아빠가 근무를 했던 곳이라고 아빠가 설명을 해 줬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많은 몽골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는데 아빠가 진료할 때 옆에서 도와 달라고 해서 나는 아빠 진료실에서 일을 하기로 하고 엄마와 내 동생 유빈이는 약국에서 일을 하기로 했다. 아빠 진료실 에서는 아빠가 2001-2004년까지 진료를 할 때 같이 근무를 했다는 몽골의사인 더여 선생님이 와있었다. 그 몽골 선생님과 아빠는 너무 반가워 하며서 좋아했다. 아빠와 더여 선생님은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환자들을 진료했고 아빠가 침을 놓을 때 내가 옆에서 침도주고 또 필요한 것이 있으면 아빠께 가져다 주고 했는데 계속 서서 일을 하다 보니 다리도 아프고 피곤했다.
둘째 날부터는 그래도 조금은 익숙해져서 덜 힘들었던 것 같다.
셋째 날에는 아빠는 진료를 하고 엄마, 동생, 나는 다른 몽골 집에 갔었다. 어트거 이모라는데 우리가 몽골에 살 때 내가 어렸는데 그때 나를 키워 줬다고 했다. 엄마랑 어트거 이모는 서로 눈물을 글썽이며 반가워했는데 나는 몽골 말도 모르고 어트거 이모도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저녁에는 어트거 이모가 우리 가족 옷을 가지고 호텔에 찾아 왔는데 내 동생 유빈이가 옷을 너무 좋아했다. 엄마 아빠는 그 옷이 엄청 비싼 캐시미어라고 하면서 어트거 이모한에 너무 고맙다고 했다. 내 옷도 예쁘고 마음에 들었다.
넷째 날에는 외국인 의사가 아빠를 찾아 왔다. 아빠가 몽골에 근무할 때 같이 공부했던 독일 의사라고 했는데 아빠랑 너무 반가워했다. 넷째 날에는 아빠 진료실에서 아빠, 더여 선생님, 욜기 선생님(독일의사), 또 다른 몽골 의사 등 4명이서 진료를 했다. 방이 좁고 뜸 냄새로 나는 힘들었는데 아빠랑 다른 의사들은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몽골말로 진료도 하고 서로 이야기도 하면서 너무들 즐거워했다. 욜기 선생님이 아빠에게 몽골 전통 옷을 선물 했는데 내가 입어 보니 나한테도 맞아서 친구들과 총싸움 놀이 할 때 방탄복으로 입기 딱 좋을 것 같았다.
진료가 끝나고 몽골 시골로 여행을 갔는데 계속 비가 왔다. 몽골 시골은 가도가도 끝이 없는 초원이었다. 산에 나무는 없고 온통 풀로만 덮여 있었는데 하루 종일 차를 타고 가도 나무가 있는 산은 볼 수가 없었다. 여행 마지막 날에 비가 그쳐서 다행히 말을 탈 수 있었다. 처음에는 너무 무서웠는데 몽골 아저씨가 내가 탄 말고삐를 잡고 가다 보니 차츰 무섭기 보다는 재미있어 졌다. 같이 진료했던 선생님들과 우리 가족과 함께 말을 타고 초원을 달려 보니 우리 담임선생님이 제일 존경하는 징기스칸이 생각났다. 개학하면 담임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몽골에서 말 타고 낙타 탔던 것을 얘기해 줘야겠다.
여러 날 동안 아침 일찍 일어나 병원 가는 것도 달갑지 않았지만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고 내가 고생한 만큼 경치도 구경하고 말도타고 낙타도 타고 침대에서 늦잠도 자고는 등 많은 행복을 얻어서 즐겁기도 했지만 거의 봉사활동의 의미로 간 것이지 놀러 간 것은 아니기 때문에 봉사활동을 할 때가 제일보람 있었고 할 일을 한 거라고 느꼈다. 그리고 몽골 사람들이 끝나고 아빠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들을 때는 기분이 하늘을 나는 듯이 기뻤다. 이때 처음으로 누굴 도와주고 얻는 의사의 보람이란 걸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어 행복했다.
비록 귀찮기도 하고 힘든 일도 있었지만 한의사가 되고 싶은 장래희망에 대한 열정은 있었던 지라 의료봉사를 할 때가 제일 즐겁고 신이 났었다. 이번 의료 봉사를 통해 집에서의 아빠가 아닌 의사로서의, 다른 사람을 치료하여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사명갑을 가지고 일하시는 아빠의 모습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나중에 또 봉사활동에 갈 기회가 오면 이번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봉사활동에 참여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