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2차 해외봉사활동 수기 경희대학교 윤상목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KOMSTA 해외 의료봉사>
2022년 여름은 뜨거운 햇살과 건조한 날씨, 적응하지 못한 물갈이, 기름진 음식, 신기했던 고려인 문화, 우리나라 말과 비슷한 고려어, 다양한 환자들과 친절했던 현지인들, 내게 아리랑을 불러주시던 현지 요양원 할머니, 함께 동고동락한 학생단원들과 존경스럽고 멋진 원장님들 등으로 나에게 많은 경험을 선사해준 소중한 추억으로 기억된다. 무려 4개월이나 지난 시점에 이 글을 쓰고 있지만, 아직도 생생하고 또 신선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제 제162차 KOMSTA 해외 의료봉사에서의 소중한 경험을 글로 남겨보려고 한다.
출국 전,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공항에 원래 일정보다 무려 1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아 혼자 공항을 서성이다가 같은 단원 복을 입은 한응이 형을 처음 만나 어색하게 인사했다. 이후 하나, 둘씩 원장님들과 학생단원들이 오기 시작했다. 나에겐 아직 어색한 출국 전의 학생단원과 원장님들이었다.
▲ 제162차 KOMSTA 해외 의료봉사팀 공항 사진 (출국 前)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기억을 꼽으라고 하면, 공항에서 3시간이나 억류되었던 사건이다. 이 사건이 우리 봉사단의 전체 일정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당시에는 생각도 못 했다. 우리나라에서 들고 온 의료용품을 비롯한 모든 용품이 세관에서 억류된 것이다. 첫날에 이런 사건으로 매우 당황했지만, 덕분에 서로를 소개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또 3개의 팀으로 나누는 것, 룸메이트를 정하는 것 등을 기다리면서 느긋하게 할 수 있었다. 이때 어색했던 분위기가 많이 풀렸고, 처음에 공항에서 만났던 한응이 형과 룸메이트이 됐다. 형과는 7박 8일의 우즈베키스탄 의료봉사를 하며 서로 다른 팀에서 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친해질 수 있었다.
제162차는 제2 국립병원팀, 고려문화협회팀, 아리랑 요양원팀으로 3개의 팀으로 나뉘어 봉사를 진행했다. 그중에서 안건상 원장님과 현규 형과 함께 아리랑 요양원 팀에서 봉사했다. 이전에 국제협력의사로 일하셨던 안건상 원장님은 러시아어나 우즈벡어를 구사하시면서 환자들을 보셨는데, 봉사하는 내내 언어를 잘 구사하여 환자를 보시는 모습이 멋있다는 생각을 계속했다. 또한 현규 형은 통역사 비탈리와 함께 예진을 봤는데 우즈벡어를 곧잘 배워서 사용하는 모습이 멋있었다. 그리고 아리랑 팀 모두 막내였던 나를 신경 써 주셔서 열심히 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팀에서 안내 및 발침, 사진 담당 등의 업무를 맡았다.
▲ 봉사 지로의 출근길 (고려문화협회팀&아리랑 요양원팀)
아리랑 요양원은 19세기 무렵과 독립운동 당시 만주에서 터를 잡고 살던 우리 민족인 고려인들을 대상으로 한 요양원이다.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을 기점으로 러시아인들에게 처음에는 환대받았으나 이후 견제와 박해를 받으며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 등으로 강제로 이주당한 고려인들은 우리와 같은 민족으로 한글을 사용하고 또 우리나라 말과는 조금 다르지만, 북한 말과는 유사한 언어를 사용한다. 봉사 전에 우즈베키스탄과 우리가 봉사 가는 곳을 조금 공부했지만, 실제로 그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또 다른 경험이었다.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은 언제나 옳다. 또한 우리가 봉사 나갔던 요양원 근처는 의료 취약지역이었다. 수도 외각에 위치하여 있는 옛 고려인 마을로 현재 근처에 의료시설이 거의 없다시피 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지역에서 또 고려인들의 이주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 한편이 아려왔었다.
아리랑 요양원 팀은 오전에는 외래환자들을 진료하였고, 오후에는 요양원을 돌면서 요양원 내원 환자들을 진료하였다.오전 진료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환자들이 매번 나갈 때마다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이나 언제까지 봉사하고 또 언제 다시 오는지를 물어보는 것이었다. 환자들이 들어오기 전보다 편한 얼굴로 나가시고 또 다음에 언제 오는지 물어보는 등의 수요가 많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꼈다. 한의학의 수요가 해외에서도 통한다는 것과 또 의료봉사를 하면서 환자들이 나아지는 것을 보며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KOMSTA에 대해서도 잠시 코로나로 중단되었었지만, KOMSTA가 얼마나 해외 의료봉사 인지도를 잘 다져왔는지도 느낄 수 있었다.
오후 진료는 아마 이 해외 봉사에서 내가 가장 크게 울컥했던 순간이 아닌가 싶다. 아리랑 요양원에 내원 중인 분들은 모두 고려인 어르신들이다. 원장님과 현규 형, 통역사 비탈리가 함께 다니며 진료를 보고 나는 이후에 병실을 돌며 발침을 해야 했다. 병실을 돌며 병실 도는 순서를 헷갈리거나 시간이 조금씩 오버하는 사건들이 있기는 했으나 다행히 현규 형과 요양원 간호사분들의 도움으로 잘 할 수 있었다. 내가 울컥했던 순간은 한 요양원의 한 할머니를 발침했을 때였다. 발침하던 중 할머니께서 갑자기 아리랑을 불러주셨는데 우리나라 아리랑과 한 소절도 다른 것이 없는 아리랑을 들으며 순간적으로 울컥했다. 이전에 요양원장님이 여기 어르신들이 자신들의 뿌리인 한국과 한국어에 대해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신다는 말을 듣고 아리랑을 들어서인지 타지에서 뜻밖에 듣는 아리랑이어서 울컥했는지는 아직도 잘은 모르겠다. 어르신 한분 한분 모두 따뜻하게 한국어를 말하고자 하셨고 덕분에 마음이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아리랑 요양원 팀 (오전 진료실 마무리)
진료 마지막 날, 오전 진료실을 마무리했을 때, 하루만 더 봉사하고 싶다는 아쉬운 마음과 마지막 봉사까지 고생하여 잘 마무리해서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 아리랑 요양원팀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 KOMSTA 한의학 학술 세미나 ▲ 세미나 KOMSTA 학생단원
KOMSTA 해외 봉사에서 학술 세미나도 함께할 수 있었다. 학술 세미나에서 느낀 것은 해외에서 한의학에 굉장히 많은 관심이 있다는 것이었다. 한의학 학술 세미나에 많은 해외 의료진들이 참석했고, 열심히 세미나를 참여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해외에서의 한의학에 관한 열의와 관심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원장님들의 강의를 들으며 조금 졸기는 했지만, 강의하시는 원장님들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하였다.
또한 세미나에서 제161차 부하라팀과도 만날 수 있었는데, 그중에는 친한 동기도 있어 우리 타슈켄트 단원들을 소개해주면서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KOMSTA 해외 의료봉사를 마치며]
▲ 우즈베키스탄 해외 의료봉사를 마치며
KOMSTA와 함께했던 우즈베키스탄 해외 의료봉사는 내 인생에 있어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소중한 경험이었다. 해외 의료봉사라는 경험을 통해 외국인들이 한의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 수 있었고, 세계 의료가 얼마나 많이 부족한지도 느낄 수 있었으며, 의료 취약계층의 현실도 볼 수 있었다. 또한 우즈베키스탄을 다녀오면서 우리나라와 우즈베키스탄의 관계 또한 알 수 있었다. 여러모로 많은 것들을 새로 알아갈 수 있었다. 사실 이러한 내용을 글로만 남겨서 전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 순간순간의 벅찬 감정, 환자들의 표정 하나하나, 같은 학생단원들과 원장님들과의 추억 하나하나는 모두 소중한 추억이다.
◀ 제162차 KOMSTA 해외 의료봉사 공항 사진 (귀국 後)
해외 의료봉사를 통해 봉사단의 많은 사람과 친해질 수 있었고,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견문을 넓히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우고, 다양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또 나 자신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도 미래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단순히 의료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왜 그 지역에 의료봉사가 필요한지 알고, 또 왜 우리가 그곳으로 봉사를 떠나는지 알고 또 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도 생각해볼 수 있었다.
우즈베키스탄 해외 의료봉사는 그러한 의미에서, 단순히 의료봉사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을 함께했던 고려인들의 아픈 역사를 보듬기 위해 또 이를 잊지 않기 위해 진행되는 의료봉사라는 것 또한 느낄 수 있었다. 또한 해외의 의료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의료봉사를 진행하면서 많은 사람이 의료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준 KOMSTA-WFK 및 관련 단체에 감사의 말씀을 남기며 다음에도 KOMSTA-WFK 해외 의료봉사단과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제 162차 해외봉사활동 수기 경희대학교 윤상목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KOMSTA 해외 의료봉사>
2022년 여름은 뜨거운 햇살과 건조한 날씨, 적응하지 못한 물갈이, 기름진 음식, 신기했던 고려인 문화, 우리나라 말과 비슷한 고려어, 다양한 환자들과 친절했던 현지인들, 내게 아리랑을 불러주시던 현지 요양원 할머니, 함께 동고동락한 학생단원들과 존경스럽고 멋진 원장님들 등으로 나에게 많은 경험을 선사해준 소중한 추억으로 기억된다. 무려 4개월이나 지난 시점에 이 글을 쓰고 있지만, 아직도 생생하고 또 신선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제 제162차 KOMSTA 해외 의료봉사에서의 소중한 경험을 글로 남겨보려고 한다.
출국 전,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공항에 원래 일정보다 무려 1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아 혼자 공항을 서성이다가 같은 단원 복을 입은 한응이 형을 처음 만나 어색하게 인사했다. 이후 하나, 둘씩 원장님들과 학생단원들이 오기 시작했다. 나에겐 아직 어색한 출국 전의 학생단원과 원장님들이었다.
▲ 제162차 KOMSTA 해외 의료봉사팀 공항 사진 (출국 前)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기억을 꼽으라고 하면, 공항에서 3시간이나 억류되었던 사건이다. 이 사건이 우리 봉사단의 전체 일정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당시에는 생각도 못 했다. 우리나라에서 들고 온 의료용품을 비롯한 모든 용품이 세관에서 억류된 것이다. 첫날에 이런 사건으로 매우 당황했지만, 덕분에 서로를 소개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또 3개의 팀으로 나누는 것, 룸메이트를 정하는 것 등을 기다리면서 느긋하게 할 수 있었다. 이때 어색했던 분위기가 많이 풀렸고, 처음에 공항에서 만났던 한응이 형과 룸메이트이 됐다. 형과는 7박 8일의 우즈베키스탄 의료봉사를 하며 서로 다른 팀에서 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친해질 수 있었다.
제162차는 제2 국립병원팀, 고려문화협회팀, 아리랑 요양원팀으로 3개의 팀으로 나뉘어 봉사를 진행했다. 그중에서 안건상 원장님과 현규 형과 함께 아리랑 요양원 팀에서 봉사했다. 이전에 국제협력의사로 일하셨던 안건상 원장님은 러시아어나 우즈벡어를 구사하시면서 환자들을 보셨는데, 봉사하는 내내 언어를 잘 구사하여 환자를 보시는 모습이 멋있다는 생각을 계속했다. 또한 현규 형은 통역사 비탈리와 함께 예진을 봤는데 우즈벡어를 곧잘 배워서 사용하는 모습이 멋있었다. 그리고 아리랑 팀 모두 막내였던 나를 신경 써 주셔서 열심히 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팀에서 안내 및 발침, 사진 담당 등의 업무를 맡았다.
▲ 봉사 지로의 출근길 (고려문화협회팀&아리랑 요양원팀)
아리랑 요양원은 19세기 무렵과 독립운동 당시 만주에서 터를 잡고 살던 우리 민족인 고려인들을 대상으로 한 요양원이다.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을 기점으로 러시아인들에게 처음에는 환대받았으나 이후 견제와 박해를 받으며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 등으로 강제로 이주당한 고려인들은 우리와 같은 민족으로 한글을 사용하고 또 우리나라 말과는 조금 다르지만, 북한 말과는 유사한 언어를 사용한다. 봉사 전에 우즈베키스탄과 우리가 봉사 가는 곳을 조금 공부했지만, 실제로 그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또 다른 경험이었다.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은 언제나 옳다. 또한 우리가 봉사 나갔던 요양원 근처는 의료 취약지역이었다. 수도 외각에 위치하여 있는 옛 고려인 마을로 현재 근처에 의료시설이 거의 없다시피 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지역에서 또 고려인들의 이주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 한편이 아려왔었다.
아리랑 요양원 팀은 오전에는 외래환자들을 진료하였고, 오후에는 요양원을 돌면서 요양원 내원 환자들을 진료하였다.오전 진료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환자들이 매번 나갈 때마다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이나 언제까지 봉사하고 또 언제 다시 오는지를 물어보는 것이었다. 환자들이 들어오기 전보다 편한 얼굴로 나가시고 또 다음에 언제 오는지 물어보는 등의 수요가 많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꼈다. 한의학의 수요가 해외에서도 통한다는 것과 또 의료봉사를 하면서 환자들이 나아지는 것을 보며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KOMSTA에 대해서도 잠시 코로나로 중단되었었지만, KOMSTA가 얼마나 해외 의료봉사 인지도를 잘 다져왔는지도 느낄 수 있었다.
오후 진료는 아마 이 해외 봉사에서 내가 가장 크게 울컥했던 순간이 아닌가 싶다. 아리랑 요양원에 내원 중인 분들은 모두 고려인 어르신들이다. 원장님과 현규 형, 통역사 비탈리가 함께 다니며 진료를 보고 나는 이후에 병실을 돌며 발침을 해야 했다. 병실을 돌며 병실 도는 순서를 헷갈리거나 시간이 조금씩 오버하는 사건들이 있기는 했으나 다행히 현규 형과 요양원 간호사분들의 도움으로 잘 할 수 있었다. 내가 울컥했던 순간은 한 요양원의 한 할머니를 발침했을 때였다. 발침하던 중 할머니께서 갑자기 아리랑을 불러주셨는데 우리나라 아리랑과 한 소절도 다른 것이 없는 아리랑을 들으며 순간적으로 울컥했다. 이전에 요양원장님이 여기 어르신들이 자신들의 뿌리인 한국과 한국어에 대해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신다는 말을 듣고 아리랑을 들어서인지 타지에서 뜻밖에 듣는 아리랑이어서 울컥했는지는 아직도 잘은 모르겠다. 어르신 한분 한분 모두 따뜻하게 한국어를 말하고자 하셨고 덕분에 마음이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아리랑 요양원 팀 (오전 진료실 마무리)
진료 마지막 날, 오전 진료실을 마무리했을 때, 하루만 더 봉사하고 싶다는 아쉬운 마음과 마지막 봉사까지 고생하여 잘 마무리해서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 아리랑 요양원팀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 KOMSTA 한의학 학술 세미나 ▲ 세미나 KOMSTA 학생단원
KOMSTA 해외 봉사에서 학술 세미나도 함께할 수 있었다. 학술 세미나에서 느낀 것은 해외에서 한의학에 굉장히 많은 관심이 있다는 것이었다. 한의학 학술 세미나에 많은 해외 의료진들이 참석했고, 열심히 세미나를 참여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해외에서의 한의학에 관한 열의와 관심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원장님들의 강의를 들으며 조금 졸기는 했지만, 강의하시는 원장님들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하였다.
또한 세미나에서 제161차 부하라팀과도 만날 수 있었는데, 그중에는 친한 동기도 있어 우리 타슈켄트 단원들을 소개해주면서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KOMSTA 해외 의료봉사를 마치며]
▲ 우즈베키스탄 해외 의료봉사를 마치며
KOMSTA와 함께했던 우즈베키스탄 해외 의료봉사는 내 인생에 있어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소중한 경험이었다. 해외 의료봉사라는 경험을 통해 외국인들이 한의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 수 있었고, 세계 의료가 얼마나 많이 부족한지도 느낄 수 있었으며, 의료 취약계층의 현실도 볼 수 있었다. 또한 우즈베키스탄을 다녀오면서 우리나라와 우즈베키스탄의 관계 또한 알 수 있었다. 여러모로 많은 것들을 새로 알아갈 수 있었다. 사실 이러한 내용을 글로만 남겨서 전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 순간순간의 벅찬 감정, 환자들의 표정 하나하나, 같은 학생단원들과 원장님들과의 추억 하나하나는 모두 소중한 추억이다.
◀ 제162차 KOMSTA 해외 의료봉사 공항 사진 (귀국 後)
해외 의료봉사를 통해 봉사단의 많은 사람과 친해질 수 있었고,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견문을 넓히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우고, 다양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또 나 자신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도 미래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단순히 의료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왜 그 지역에 의료봉사가 필요한지 알고, 또 왜 우리가 그곳으로 봉사를 떠나는지 알고 또 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도 생각해볼 수 있었다.
우즈베키스탄 해외 의료봉사는 그러한 의미에서, 단순히 의료봉사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을 함께했던 고려인들의 아픈 역사를 보듬기 위해 또 이를 잊지 않기 위해 진행되는 의료봉사라는 것 또한 느낄 수 있었다. 또한 해외의 의료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의료봉사를 진행하면서 많은 사람이 의료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준 KOMSTA-WFK 및 관련 단체에 감사의 말씀을 남기며 다음에도 KOMSTA-WFK 해외 의료봉사단과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