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네팔 단기 한방의료봉사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게는 참 행운이다. 살면서 남에게 도움되는 사람이 되자며 다짐하고 한의대에 입학한지 벌써 5년째, 국내 봉사는 이곳 저곳 다녔지만 해외봉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의료 혜택이라고는 거의 접하기 어려운 그들의 생활에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영광이며 행복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순수한 이타심만으로 봉사에 지원한 것은 아니었다. 지난 여름에 중국에서 두달간 연수를 받을 기회가 있었는데, 중국 정부의 강렬한 중의학의 세계화 의지와 아낌없는 지원을 보면서 위기감과 함께 해외에서의 한의학은 어떠한지 실정을 알아보고 싶었다. 또, 어느 새부터 한의학 자체의 효용성에 의구심과 회의감에 빠지고 타성에 젖어 마지못해 공부를 하고 있구나 스스로 느끼던 차였어서, 이번 기회에 그 효과를 직접 경험하고 동기부여를 하여 다시금 학습의 추진력을 얻고 싶었다. 어려운 네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간절한 마음만으로 오신 팀원분들에 비해 나의 봉사 동기는 다소 불순한 것 같아 부끄럽다. 어찌되었거나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콤스타의 해외 의료봉사는 오랫동안 꼭 참여하고 싶은 봉사였고, 반년간 콤스타 사이트의 공고를 하루에도 수차례 확인한 끝에 봉사 기회를 얻게 되었다.

다딩에서의 첫째날.
숙소에서 진료소까지 가는 차를 얻어타지 못해 예상치 못하게 산 중턱의 진료소까지 등산을 하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매일같이 북한산을 등반해왔기에 이쯤이야 싶어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이 화근이었다. 등산로가 한국처럼 잘 닦여진 것도 아니고 길로 추정되는 곳을 조심조심 오르는데, 급격한 경사와 건조한 흙 때문에 쉽게 미끄러지고 그때마다 흙먼지가 부옇게 일었다. 한낮의 뙤약볕 아래에서 두꺼운 옷차림을 원망하면서 땀을 뻘뻘 흘리며 진료소에 도착하였다.한의사선생님들이 많이 오시는 날이라는 소문이 나서, 진료소 앞에는 환자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진료 시작 전에 한 여성분이 선물을 들고 왔다. 중기팀 선생님의 치료 덕분에 아픈 허리가 다 나았다며 울먹거리는데 그간의 중기팀의 노고와 헌신적인 진료가 눈으로 보이는 듯 했다.
이 날 나는 유미경 원장님의 진료보조를 맡았다. 나는 좋은 운동화를 신고도 오르기 힘든 산을 네팔 사람들은 일반 양말에 조리를 신고 혹은 맨발로 오르내리며, 그 차림으로 고된 노동까지 하다보니 대부분의 사람이 무릎과 허리 통증을 기본으로 가지고 있었으며 발가락이 심하게 변형된 경우도 종종 있었다. 옷을 조금만 건드려도 먼지가 사정없이 풀썩이고, 물이 부족해 잘 씻지 못해서 냄새는 물론이고 침을 놓기 위해 알콜솜으로 문지르면 때가 검게 묻어나온다. 그래서인지 호흡기질환, 피부질환 환자들도 많고, 전반적으로 위생 및 영양상태가 매우 좋지 못했다. 여자들은 일찍 결혼해서 열아홉, 스물의 어린 나이에 이미 결혼을 하고 아기까지 있는 사람이 많았다.
남을 보며 저것보단 내가 낫지 생각하는 태도는 혐오함에도, 내 또래의 친구들을 보며 저절로 나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잘 포장된 도로, 깨끗한 화장실, 냉난방시설, 원하는 공부를 하며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내게 우연히 주어진 특권이었음을 이 곳에 오기 전에는 미처 몰랐다.
이 날 환자 중 기침을 할 때마다 소변이 샌다는 젊은 요실금 환자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중년의 남성 통역사분은 세상에 그런 건 처음 듣는다며 껄껄 웃으셨지만, 얼마나 난처하고 남몰래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을지 같은 여성으로서 안타깝기도 하고, 장기간 한방 치료를 받는다면 많이 호전될 것인데 여건이 여의치 못해 정말 아쉬웠다. 또 오랜 기간 편도염 증상으로 고생했다던 환자에게 원장님이 침 치료를 해주셨는데 약을 처방받으러 가는 길에 환자가 놀란 표정으로 치료 받기 전보다 훨씬 나아졌다고 하여 나까지 덩달아 기뻤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오후 다섯시 경에 가까스로 진료를 마무리 하고, 저녁을 먹고 하산한다. 진료소 앞에 내일 진료를 받기 위해 전날 저녁부터 노숙을 하는 주민들이 있었다. 네팔은 일교차가 커서 밤에는 패딩을 입고 이불을 덮어도 추위에 덜덜 떨며 겨우 잠을 청하는데, 저들은 얇은 옷들을 칭칭 동여매고 냉기 올라오는 흙바닥 위에 쪼그려 불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 하룻밤을 꼬박 보내야 함이 마음 아팠다.

진료 둘째날. 이 날은 장정현 원장님의 진료를 보조하게 되었다. 진료실이 다른 진료실보다 불빛이 침침하고 으슬으슬한데도 개의치 않으시고 엄청난 에너지로 환자분들을 빠르게 진료하셔서 내심 감탄했다. 환자들을 여덟명씩 쉴새없이 보시는 장 원장님이 아니었으면 사백명이 훌쩍 넘는 환자들을 시간 내에 다 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 날의 환자 중에서는 쉴새없이 트림을 하시던 한 할머니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학교에서 噫氣를 배울 때 트림을 굳이 치료할 필요가 있냐며 친구들과 웃었던 적이 있는데, 10초가 멀다하고 트림을 계속하시는 할머니를 보며 고서에서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병적인 경우였구나 나의 무지함을 반성하였다. 중기팀의 박재은 선생님 말씀을 들어보니 우리나라는 온갖 병원을 전전하고 이 약 저 약 다 먹어보고 마지막으로 한의원에서 오기 때문에 증상이 많이 변형된 환자들이 오는 반면, 이 곳은 병원이라고 할만한 곳이 거의 없어 원형 그대로의 환자들이 곧바로 이 곳에 오고 영양 상태도 좋지 못해 조선시대 환자와 크게 다를바가 없다고 한다. 공부를 할 때 서적이 쓰여질 당시의 환경과 영양 상태까지 고려해야함을 새삼 느꼈다.

셋째날은 김현경 원장님의 진료를 보조하였다. 원장님이 바쁜 진료 와중에도 틈틈이 내게 진단과 치료 팁을 가르쳐주셔서 정말 감사했다.
한 할머니의 증상을 듣고 있던 통역사 선생님과 주변 네팔인들이 일제히 크게 웃어서 이유를 물으니, 오만군데 안 아픈 곳이 없고 아들 때문에 그저 죽고 싶으시단다.이후로도 끊임없이 넋두리를 하시는데, 자식 때문에 속썩이는 것은 한국이나 네팔이나 마찬가지구나 싶어 웃음이 났다.
침을 맞느라 누워있는 엄마 옆에서 굵은 눈물을 흘리던 아기도 기억에 선명하다. 아기의 눈에는 아마도 엄마가 고문받는 걸로 보였나 보다. 사탕을 주니 언제 그랬냐 싶게 뚝 그치고 야무지게 사탕을 쥐는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한의학이 네팔에서도 대중화되어 아이들도 놀라지 않고 익숙하게 진료받을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다.
워낙 많은 환자를 보다보니, 이 날은 침훈이 심하게 온 환자를 볼 수 있었다. 영양 상태가 좋지 못하고 침 맞을 때 긴장을 심하게 해서 그런지 침을 맞자마자 어지럼증을 호소하고 얼굴에 땀을 쉴새 없이 흘린다. 이렇게 침훈이 심하게 온 환자를 처음 봐서 당황하고 있었는데 원장님 말대로 편히 눕히고 땀을 닦아주고 물을 마시게 하고 손발을 주물러주는등 조치를 취하자 이내 좋아졌다.

마지막 날은 다시 장정현 원장님 진료보조를 맡았다. 이 날 다섯살짜리 소녀가 허리 부분이 문제가 있다고 표시된 차트를 들고 들어왔다. 어린 아이가 왜 허리가 아프지? 하며 소녀의 허리를 들춰보고는 나도 모르게 헉하며 놀랐다. 목덜미부터 등 전체가 검은 점과 털들로 새까맣게 뒤덮여 있었고, 꽤 넓은 부위에 혹이 있었다. 출생시부터 그랬다고 하는데, 사실상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 정말 안타까웠다. 한국에 와서 찾아보니 비슷한 사례들이 외과적 수술로 호전되는 경우들이 있던데 소녀에게도 그런 기회가 주어질 수 있기를 기도해본다.
마지막 진료를 마무리하고 한창 짐을 싸고 있는데, 한 네팔인 할아버지가 와서 뭐라 뭐라 말을 하더니 눈이 그렁그렁해진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한국팀이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는 마음은 그대로 전해져왔다. 다음 만남이 있기를 기약하며 다딩을 떠났다.

한의학의 우수성을 전파하고 위상을 높이는데 이바지하는 콤스타 활동에 참여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또 짧은 기간이었지만 많은 환자들에게 봉사할 수 있어 기뻤고, 좋은 팀원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봉사란 무엇인가 많이 배웠다. 특히 정교수님이 해주신 ‘봉사는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이번 네팔 봉사는 내 삶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경험이자 추억이 될 것 같다. 앞으로도 많은 봉사에 참여하여 내가 가진 작은 힘을 보태고 싶다.